조선왕능의 비밀 4 - 서삼능 1문화재 1지킴이 (진천 농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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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능의 비밀 4 - 서삼능

자료출처
:- 문화제청 http://cha.korea.kr/gonews/branch.do?
자료생성 :- 2009. 07.20 문화재청
자료옮김 :- 임충섭(1문화재 1지킴이, 독도KOREA홍보위원, 쿠웨이트정부병원)

보낸 사람문화재청 <chlove@ocp.go.kr> 

받은 날짜2009년 07월 20일 19시 11분
받은 사람임충섭 <q8imcs@empal.com>


문화재 향기
[조선왕릉의 비밀 ④ - 서삼릉]
2009-07-20 오후 05:26




                        사적 제 200호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서삼릉 가는길 |
서울시내 → 구파발 → 삼송리 검문소에서 좌회전(삼송역) → 농협대학 지나서 이정표



                                         
< 서삼릉 | 西三陵 >



서삼릉은 도성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이 이곳에 있다. 1537년(중종 32)에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묘 희릉을 옮겨와 조성하면서 왕릉군(王陵群)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서삼릉의 능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 조성된 희릉은 본래 3대 태종의 헌릉(獻陵) 옆으로 택지가 결정되었으나 권력다툼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고, 중종의 정릉(靖陵)도 한때 이 희릉 옆에 조성되었다가 명종 17년에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주장으로 현 위치인 서울 강남구 삼성동(선릉)으로 옮겨갔다.

그 후 1545년 최단명 임금인 12대 인종과 1555년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를 모신 효릉이 자리 잡았고, 고종 때인 1865년 25대 철종과 1878년 그의 비 철인왕후 김씨를 모신 예릉이 들어서면서부터 ‘서삼릉’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현재 서삼릉에서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능은 희릉과 예릉이다. 효릉은 축협 소유의 초지로 둘러싸여 축협을 통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왕릉이다.

이 능역에는 희릉, 효릉, 예릉 외에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 장조의 아들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등 3원과 성종의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를 비롯해 조선 말기까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 등 46묘(墓), 태실 54기(基)가 들어서 있다. 서삼릉은 조선 왕실의 묘가 가장 많이 모여 있어, 왕실의 집장묘가 된 셈이다.


                                           
  < 효릉 | 孝陵 >


<인종은 조선왕조 역사상 재위 기간(9개월)이 가장 짧은 왕으로, ‘죽거든 부모 곁에 묻어주고 소박하게 장례를 치러 백성들의 힘을 덜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조선 12대 인종(仁宗, 1515~45)과 그의 비 인성왕후(1514~77)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것과 죽은 뒤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묻어주고 장사를 소박하게 치를 것을 유교로 남기고 보령 3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인종과 인성왕후의 쌍릉인 효릉. 인종의 유언대로 인종은 어머니인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희릉 옆에 안장되었다. 능호도 ‘효孝’ 자를 써서 효릉이라 하였다.>

인종은 유교대로 어머니 장경왕후(희릉) 옆 언덕에 안장되었고, 인종의 효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호를 ‘효릉’이라 했다. 인성왕후도 후일 인종 왼쪽에 비워놓았던 왕비릉 자리에 안장되었다.


                                              
<예릉 | 睿陵 >


<예릉은 사도세자(추존 장조, 정조의 부)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갑작스레 왕위에 오른 철종과 철인왕후를 함께 모신 쌍릉이다.>

조선 25대 철종(哲宗, 1831~1863)과 그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78) 김씨의 능이다. 철종은 장조(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9세에 순조의 비 순원왕후에 의해 왕으로 즉위하였다. 처음 3년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고, 그 후에 친정을 하긴 했지만 왕후 집안의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했다.


<재위 기간 동안 비록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꼭두각시 노릇을 하였지만,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황제의 뜻에 따라 왕릉이 웅대하게 꾸며졌다. 결국 예릉은 조선 왕릉 상설 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왕릉이 되었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철종의 삶과는 달리,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철종의 능을 매우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미게 된다. 이는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꿈꾸던 대원군의 뜻이기도 하였다.
부덕이 높은 여인이었던 철인왕후는 1878년(고종 15)에 승하 후 철종 곁에 안장되었다.


                                            
< 희릉 | 禧陵 >


<희릉은 장경왕후 단릉이나, 중종 사후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중종과 함께 안장되어 정릉이라 불린 적이 있다.>

조선 11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윤씨의 능이다. 장경왕후는 정비인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봉해졌는데 세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했다.


<축문을 태우는 자리인 예감. 조선 초기에 조성된 왕릉(태조 건원릉, 태종 헌릉)에서는 소전대에서 축문을 태웠다. 세종 영릉 이후 소전대가 생략되고 예감(본래 축문을 묻은 석함)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정자각의 북서쪽 위에 자리한다.>

처음에는 헌릉(태종 왕릉) 서쪽 언덕에 조성했다.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그 중 하나가 희릉 천릉사건인데,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하여 1537년(중종 32)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1544년 중종의 유교에 따라 중종의 정릉을 희릉 옆에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릉과 왕비릉 중간으로 옮겨 세우고, 왕의 능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1562년 문정왕후의 주장에 의해 중종 왕릉이 지금의 삼성동(선릉) 옆으로 옮겨감으로써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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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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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_문화재청 대변인실 (042.481.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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