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도립공원 [ 南漢山城道立公園 ] 남한산성 문화재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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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도립공원 [ 南漢山城道立公園 ]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99122&v=42
자료생성 :- 2009, 06, 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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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하남시·광주군에 걸쳐 있는 도립공원. 면적 36.44㎢. 1971년에 지정되었다. 이 공원은 경기도의 대표적인 도립공원으로 서울과 성남시민들이 가장 이용하는 근린자연공원이다.


산의 위용도 좋지만 무엇보다 사방에서 정상을 오르기는 급경사이나 산정의 내부에는 큰 분지가 이루어져 천연의 요새지가 되어 능선을 따라 산성을 쌓아 역사적으로 유명하며, 산보다도 사적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고 성내의 유물·유적도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남한산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이외에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장경사(長慶寺) 등 문화재가 많은 역사적인 곳이고 어느 도립공원보다 등산로와 내부의 전시실, 숙박시설 등이 잘 되어 있다.


초기에는 규모가 작은 성이었으나 현재와 같은 산성은 1621년(광해군 13)에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기 시작하였으나, 그뒤 청태종의 침략 의도가 구체화되자 1624년(인조 2)에 축성을 보격화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636년 청태종의 침략군 20만에 밀려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에 피신, 포진한지 40여일만에 삼전도에서 청태종 앞에 항복을 한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곳이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건물은 소실되고 남은 것은 10여채에 불과하나 교육관광 안보관광지로 역할을 한다.


≪참고문헌≫ 韓國觀光地理(金洪雲, 螢雪出版社,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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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사회시설 > 공원 > 도립공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유적 > 명승

          제목 : 남한산성 원본보기
설명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둘레 약 8,000m. 사적 제57호.
          출처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련항목 : 남한산성도립공원


      제목 : 남한산성도립공원 원본보기
설명 :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 광주군에 걸쳐 있는 도립공원. 면적 36.44㎢.
      출처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련항목 : 남한산성도립공원




수어장대
[ 守禦將臺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면적은 1층 105.08㎡, 2층 43.29㎡이다. 아래층 평면은 내진(內陣) 3×2칸과 외진(外陣) 5×4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였으며, 맨 바깥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높게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 주춧돌을 받쳤다. 외진부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진부에는 긴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기둥이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첨차 끝은 모두 수서〔垂舌〕이다. 2층 평방 위에만 화반(花盤 : 주심도리 밑 장혀를 초새김한 받침)과 운공(雲工 : 화반 상부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로서 고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마루보 위에는 판대공(板臺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도리를 걸었다.


합각벽(閤閣壁)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고, 용마루·합각마루 및 1층 추녀마루에 용두(龍頭)를 얹었으며, 사래〔蛇羅 :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서까래〕 끝에는 토수(吐首 : 용머리와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창호(窓戶)는 위층에만 있으며 매칸마다 2짝 판문(板門)을 달았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외부 정면에 ‘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안쪽에는 ‘無忘樓(무망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참고문헌≫ 京畿道指定文化財實測調査報告書(京畿道,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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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유적 > 국방유적 > 성곽


 

제목 : 수어장대 원본보기
설명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이다.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출처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련항목 : 수어장대




장경사
[ 長慶寺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남한산성 축성 때 팔도의 역승(役僧)들의 숙식을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 그 당시에 있던 9개 사찰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축성 당시 나라에서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를 번갈아 징집하여 사역(使役)을 돕게 하였는데, 각성은 1638년(인조 16)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 효종이 북벌(北伐)을 계획하였을 때에는 이 절에 총섭을 두어 승군(僧軍)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내의 8개 사찰뿐 아니라 전국의 승군을 지휘하는 국방사찰(國防寺刹)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그 뒤 고종 때까지 250년 동안 북한산성과 함께 이 남한산성에도 전국에서 뽑은 270명의 승려들로 교체하면서 항상 번승(番僧)을 상주입번(常駐立番)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승병들의 국방활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동향한 정면 3칸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鎭南樓)·칠성각·대방(大房)·요사채 등이 있다.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文化財管理局, 1977)

≪참고문헌≫ 韓國寺刹全書(權相老 編,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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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장경사 원본보기
설명 : 경기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남한산성 축성 때 팔도의 역승들의 숙식을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 당시 9개 사찰 중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출처 :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관련항목 : 장경사   




남한산성[ 南漢山城 ]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안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1,897개,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3개, 성랑(城廊 : 성 위에 세운 누각) 115개, 문 4개,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만든 작은 성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 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 하궐(下闕)이 154칸이었다. 궁실에 따른 건물로는 1688년(숙종 14)에 좌덕당(左德堂)을 세우고, 1711년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하여 좌전(左殿)을 세웠다.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이 있다. 1798년(정조 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수어청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 후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에 각각 진을 치게 되었고, 좌영장은 동장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壇)으로 나가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輿地圖書

≪참고문헌≫ 廣州邑誌

≪참고문헌≫ 南漢日記

≪참고문헌≫ 丙子錄

≪참고문헌≫ 文化財大觀-史蹟篇 下-(文化財管理局, 1976)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 上(文化財管理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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