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期 北進勢力 築造說-농다리-기록되지 않았어야 할 異說이었다. 鎭川金庾信將軍史蹟學術調査報告書(鎭川籠橋)의문점들...

 

三國期 北進勢力 築造說-농다리-기록되지 않았어야 할 異說이었다.


三國期 北進勢力 築造說-농다리-

기록되지 않았어야 할 이설(異說)이었다

 


자료출처
:- 임충섭 본인 작성 (1문화재 1지킴이 위촉 - 문화재청)

자료입력 :- 2004년 4월 23일  (금) 23:25

자료原典 :-

자료작성 :- 임 충섭(1978년-쿠웨이트 정부 치과병원)

                   1문화재 1지킴이(농다리)위촉-문화재청(2005년)
                   독도KOREA홍보위원-재외동포재단(2005년)


참고자료
:- 1)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

                   2) 檀國大學校 史學志6집 - 金庾信의 百濟 攻擊路를 硏究 1972

                   3) 常山誌

                   4) 朝鮮환輿勝覽

                   5) 高麗史

                   6) 高麗史節要

                   7) 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8) 鎭川郡誌 1994

                   9) 한국의 석조미술 1998

                  10) 三國史記

 

제가 농다리 축조와 관련된 공부를 시작할 때는 농다리 축조와 관련된 여러 異說들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농다리와 관련된 史書에 기록된 진실은 하나일진데 이설(異說)은 여럿 있습니다.

잘못 기록된 이설로 인하여 또 다른 이설이 확대 재생산되어 인터넷상에 급속히 유포며, 학생들의 교육 현장까지도 잘못된 정보가 유입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진실(정설)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휴가를 이용하여 한국과 쿠웨이트를 오가며 10년 이상 공부했습니다.

매년 한국으로의 휴가 3개월을 거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내면서 농다리 축조와 관련된 자료를 찾기위한 공부를 햇습니다.

평소에 탐구욕이 강한 저의 성품이 바탕이된 농다리와의 인연이 지속적인 공부를 하면서 필연으로 바뀌었고, 천여년 전 농다리를 축조하셨던 선인들의 氣가 저에게 전달 되었는지 그분들의 한을 풀어줄 훌륭한 대변인이 될것을 자청하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비 전문가로서 의료기사라는 직업인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어려운 작업인지 경험해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978년부터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에 치과기공사로 현재까지도 쿠웨이트 공무원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는 교민입니다.  

여기에 제가 어떻게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를 소상히 기록합니다

                                     __________________  *******  ______________________


아래의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
  농다리 관련 

三國期 北進勢力 築造說 의 핵심 자료 로 제시 되고 있는 자료 입니다.
 

제가 아래의 자료 중 농다리 관련 부분을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여러 곳에 사실과

다르게 기록 되어있음을 발견
하고 그 잘못된 것을 이곳에 모두 기록합니다.




韓國敎員大學校 博物館長이신 鄭永鎬 敎授의(1999년)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


23쪽 위에서 2째줄 에 농다리 김유신장군 축조설과 관련하여 참고자료 로서

(鄭永鎬,「金庾信의百濟攻擊路 硏究」『史學志』6집, 1972년)

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이중 진천에서 청주에 이르는 길은 大母山城→籠橋(농다리)→초평(두타산성)→증평→초정→세교→청주를 통하는 도로를 통과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농다리에 특별히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이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를 읽으셨었다면 韓國敎員大學校 博物館長이신 정영호 교수님의 1972년에 『史學志』6집 에 발표한 「金庾信의百濟 攻擊路 硏究」에 진천농다리는 三國期 北進勢力의 주체이었던 金庾信將軍에 의해서 축조된 石橋로 절대적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史學志』6집 에 실린 「金庾信의百濟 攻擊路 硏究」를 찾아 읽어본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인 것을 찾아본 분이라면 경험했을 것입니다.


제가 필요에의해 관심있게 찾아보는데도 수많은 날들을 보냈으니까요.



『史學志』6집에 실린 농다리 축조 관련

자료라고 제시한


金庾信의百濟 攻擊路 硏究



-국립중앙도서관


-도서 청구번호 201-16-6-C.2


이오니 필요하신분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史學志』6집 에 실린 鄭永鎬 敎授님「金庾信의百濟 攻擊路 硏究」

19쪽∼62쪽에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중에서 19쪽부터 60쪽까지의 내용에는 농다리가 위치한 鎭川이라는 지명이 한곳도 기록되어있지않습니다.


『史學志』6집 전체내용(19쪽∼62쪽)중에 농다리가 위치한

鎭川이라는 지명은 『史學志』6집 의 마지막 페지


'Ⅴ. 結論'부분에 단 한번 기록되며


농다리농교(籠橋),   진천농다리,  진천농교,  鎭川籠橋 라는 교량의 이름

단 한번도 기록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史學志』6집
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현실인데
누가 이 엄청난 사실을 알고있을까요.


『史學志』6집 의 58, 59, 61쪽에 기록된 'Ⅴ. 結論' 부분을 옮겨 적어봅니다.


Ⅴ. 結論


序頭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新羅 三國統一의 전초적인 사업이었던 百濟 征伐에 있어 그 攻擊路의 究明문제는 전혀 論外로 하여 왔던 바 이 進擊路가 현재 우리들과 가까운 南韓地域이므로 능히 밝힐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였던 點 筆者는 着眼하여 이 攻擊路程을 찾아내는 일을 主目的으로 함에서 首題에 따른 論攷(논고)를 展開, 整理해 본 것이다.

첫째, 新羅가 百濟를 攻滅(공멸)하기 前 까지의 兩國間의 諸問題를 고찰해보았을 때 한 때는 高句麗의 南下勢力에 對備하기 위하여 성립된 공수공存의 友好關係는 新羅 眞興王때 이르러 新羅의 先攻으로 폐기되고 더욱이 年次로 일어난 百濟 聖王의 參死事件으로 因하여 百濟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아 歷代 諸王이 時時로 新羅邊境 乃至는 내륙 깊숙히까지 侵攻해 오다가 마침내는 大耶城에서 城主 品釋一家를 殺害함으로써 원한의 一端은 풀은 셈이었으나 新羅에게는 도리어 百濟에 대하여 큰 怨恨을 품게 되었는데 여기에 다시 陽山싸움에서 王孫인 金歆運 一軍이 全滅한 慘變을 當하게 되었음에 新羅의 怨恨은 極 에 達하고 있었다.

이렇듯 百濟에 대한 怨恨이 極限에 이르렀을 때 百濟攻滅의 覺悟가 굳어지게 된 데에는 一言하여 金庾信의 힘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라 하겠다. 김유신은 어린 17,8歲 때부터 百濟와 高句麗를 攻滅하여 三國을 統一 하려는 雄大한 기상을 품고 이러한 뜻을 하늘에 맹서까지 하였으며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필생(畢生)의 課業이었으며 이러한 宿願은 당시 百濟에 대한 新羅의 怨恨을 풀어주는 오직 唯一의 機會로 드디어는 金庾信을 大將軍으로 한 百濟征伐軍을 擧兵하기에 이른 것이다.

둘째, 百濟征伐軍을 本格的으로 出征케 한 것은 당시의 情勢下에서 記錄에도 보이듯이 武烈王 七年(660) 六月 二十一日 德物島(지금의 德積島)에서 太子法敏이 唐將 蘇定方과의 會談에서 唐의 鼓舞的인 確答은 받고 난 뒤의 일이니 그 出兵은 역시 南川停으로부터 생각해야 되겠고 아울러 攻擊路程을 이 地點에서 시작해서 살펴 나가야 되겠다. 그런데 新羅軍이 마지막으로 新羅땅을 벗어나 百濟領域에 進軍한 곳이 炭峴을 넘어 黃山原이라 밝혀져 있기 때문에 우선 南川停에서 출발하여 炭峴에 이르기까지 당시 新羅가 制覇하고 있었던 地域과 그 곳의 要塞問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見解에서 찾은 곳이 前述基地로서의 今突城이고 報恩의 三年山城과 沃川의 山桂里 土城 및 小西里 장군재이며 또한 沃川의 吉利山城으로 이 地點은 모두 南川停으로부터 連結되는 要衝地임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마지막의 문제가 炭峴까지 이르는 進軍路를 어느 方面을 擇했느냐는 것인데 第一路인 永同 陽山 經由行路의 開拓은 일찍이 失敗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第二路인 沃川의 郡西-錦山의 馬田行路를 擇할 수 밖에 없었다는 見解에서 金庾信의 百濟攻擊路는,

南川停-三年山城(報恩)-山桂里 土城(沃川)-장군재(沃川)-구진베루(沃川)-郡小(沃川)-馬田 (錦山)-錦山-炭峴의 經路라 할 수 있겠다.(圖15 參照)

여기서 한가지 附言할 것은 그러면 南川停에서의 出兵日字가 언제쯤이 었겠느냐는 문제인데 위와같은 路程에서 七月 九日 炭峴을 넘은 날짜에서 逆算하면 五萬의 人馬가 하루 平均 四,五十里를 行軍한다고 생각할 때 錦山에서 炭峴까지를 하루, 馬田에서 錦山까지를 하루(여기는 가까운 곳이나 다음 날 炭峴을 넘어야 될 것이니 人馬의 再整備가 필요하였을 것이므로 하루로 작정 할 수 있음), 吉利山城에서 馬田까지, 山桂里土城에서 吉利山城길까지 三年山城에서 山桂里土城까지를 하루씩 잡으면 결국 三年山城에서 炭峴까지 約 五日이 걸리는 셈이되며 이곳 三年山城에서 南川停까지를 報恩- 淸州- 鎭川 -利川行路로 보아 約 五日로 잡으면十日間의 行軍日程이 되어 六月末頃에 出兵하였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可能한데 당시 六月 二十一日 德物島會談이 있은후 法敏이 그 곳에서 南川停까지 귀영(歸營)하는 日字가 있을 것이고 또 新羅軍으로서는 莫强한 軍勢整備가 있었을 것이니 그러자면 역시 出征日字는 六月 末이 될 것이다.

上記한 바 三年山城(報恩)으로부터 南川停(지금의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이천읍-忠燮)까지의 路程은 밝히지 않았는데 이것은 실로 高句麗方面의 進軍路인까닭에 여기서는 論外로하였다. 앞으로 筆者가 高句麗 攻擊路를 究明할 기회가 있다면 그 때 이곳의 行路를 밝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本稿에서 序頭에 羅·濟關係를 論할 때 唯獨 「金庾信의 宿願」이라는 細項까지 設定하여 金庾信의 關係內容을 考察한 것은 本 論攷의 目的이 金庾信이 取한 攻擊路究明이기때문인것이며, 그러기에 主人公을 비롯 그의 父, 祖父까지 一門을 들어 그들의 큰 功績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아직도 細部行路를 찾기에는 未然한 문제가 多少 있으나 우선 大路를 찾은 본攷를 發表하는데 數年間 現地踏査와 資料整理 및 路程推理에 많은 助言을 하여준 同學들에게 謝意를 表한다.


1999년 혹은 2000년 초 쯤(정확한 날자 기억나지않음)에 농다리와 관련하여 진천군청 홈페지 참여마당의 "군수에게바란다"라는 코너에 농다리와 관련하여 질의를 했고 당시 담당자께서 답을 다음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머나먼 외국에서 고생하시면서 고향의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질의하신 진천농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축조기법이 특이한 문화재입니다.

질의하신 김유신장군이 놓았다고 하는 설은 6∼7세기 해당하며, 이 시기 축조를 주장하는 학자는 정영호(문화재위원, 전 단국대·한국교원대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진천농교는 김유신이 처음 출전하는 낭비성전투(629)의 군사이동로인 진천에서 청주로 향하는 고대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일전쟁시기(660)에 무열왕이 5만군을 이끌고 남천정(경기도 이천)에서 보은의 삼년산성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로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래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따라서 김유신장군의 백제공격로는 이 곳을 통과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신라의 서북진로 요새인 만노산성과 두타산성, 낭비성을 연결하여 군사적 요로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축조기법상 축조양식과 각 부의 수법이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에 가설되었기보다는 삼국 기 신라의 북진세력에 의하여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진천농교의 축조시기를 기록한 직접적인 자료는 1932년에 간행된 『常山誌(상산지)』가 남아 있으며, 고려초엽의 임장군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영호는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축조기법상의 양식과 각 부의 수법으로 축조시기를 가늠하여 진천농교의 축조시기를 신라시대의 김유신장군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설의 자료는 1999년에 조사한진천김유신장군사적학술조사보고서』가 있습니다. 

라고 적어주셧습니다.


위 답변 내용에서 문제점은 답을 적은 분이 '김유신이 처음 출전하는

낭비성전투(629)' 에서 낭비성(娘臂城)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답을 적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낭비성(娘臂城)은 아직까지도 역사 기록마다,


그리고 현존하는 학자마다
주장하는바가 다르다


는 사실을 알고있는 분이 몇이나 되려는지요.


정영호 교수님이 작성한『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66쪽의 밑에서8쭐의 내용에


"한편 『常山誌』에 의하면 이 다리는 高麗 高宗 때의 權臣인 林衍將軍이 그의 全盛期에 출생지인 구곡리 굴티 앞 洗錦川에 가설한 것이라 전한다"

라고 史書내용과 다르게 기록하고있습니다.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15쪽 내용에는


문헌조사 및 기초자료 수집 : 10일


현지조사 및 연구
·분석 : 20일


하였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그러나 10일 동안 문헌 조사를 했다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소개합니다.


진천 농교(籠橋)와 관련된 『常山誌』의 사실적 내용은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에서 밝힌 『常山誌』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은 알아야합니다.


농다리와 관련된 『常山誌』의 내용에는


『 籠橋在郡南一里洗錦川加里川合流之屈峙前橋

也距今九百餘年前卽麗朝初葉時代屈峙林氏先祖

傳稱林將軍....중략』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려 초엽시대에 굴테의 임씨 선조 전칭 임장군 이라 하는 분이 농교를 놓았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鎭川金庾信將軍史蹟 學術調査報告書』에서는 『常山誌』에 의 하면 이 다리는 高麗 高宗 때의 權臣인 林衍將軍이 그의 全盛期에 출생지인 구곡리 굴티 앞 洗錦川에 가설한 것이라 전한다 라고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환여승람

상산지(常山誌)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