常山誌에 기록된 영수사(靈水寺) 중수기(重修記) 내고향 충북 진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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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山誌에 기록된 영수사(靈水寺) 중수기(重修記)

자료출처 :- 常山古蹟會
자료입력 :- 2008.02.25
자료原典 :- 國譯 常山誌
자료옮김 :- 임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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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常山)의 읍치(邑治) 동쪽에 산이 있으니 두타산(頭陀山)이라하고, 그 아래에 사찰이 있으니 영수사라 하니 옛날의 절이다. 그 세운 연대와 중수(重修)한 지가 몇 해나 지났는지 살필 수 없다. 절의 위치가 초평(草坪)에 소속되니 초평은 나의 고향이다. 대웅전의 높음과 승방(僧房)의 넓음은 작은 암자와 비교가 아니 된다. 그런데 벽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어져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스님들이 편히 지낼 수가 없어, 나는 이 때문에 걱정이 깊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느 날 주지스님이 증수 하는 일을 나에게 와서 의논하니 스님의 법호는 묘익(妙益)이다. 묘익의 말에 으르기를 절의 주봉(主峰)은 두타산이 되어 만일 해가 가물면 비를 빌고 홍수가 나면 개이기를 기원하며, 반드시 이 산에서 행사하고 절에서 재계한다. 절이 있는 마을을 초평이라 하여 밭에 김을 매는 자도 지나가고, 나물 밭의 울타리를 힐 사람도 이 산으로 가서 이 절에서 쉬니, 더욱 감화가 있다고 하였다.

소승(小僧)의 스승은 법장(法章)스님이니, 선사(先師)는 이 시골에서 태어나 살면서 이 절에서 늙어 죽었다. 소승도 또한 이 절에서 태어나 이 절에서 자랐고, 선서가 의발(衣鉢)을 소승에게 전했으니 소승의 이 몸은 선사의 힘을 입은 것이다. 선사가 실아 있을 때 항상 이 절을 중수하는 일을 걱정 하였는데,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뜨면서 부탁한 말이 있다. “지금 이 절이 기울어짐이 날로 심하고 스님들이 떠나는 자가 날로 증가하니, 소승은 선사가 마치지 못한 뜻을 이루고자하고 또 다행히 여러 스님들이 따르니, 이 일을 가지고 감히 알립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좋다고 말 하였다. 나 또한 초평에서 대대로 살던 사람이고, 또 나의 8대 분묘가 모두 이 마을에 있어 두타산을 주산으로 삼고, 영수 사를 재궁으로 삼아, 공경하고 중히 여기기를 고향과 같이 할뿐만 아니라 지금 너의 말은 곧 나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에 초평에서 만나 여러 종친들과 의논하니, 혹자는 금품이나 재물을 내고 혹자는 종을 보내어 일을 도왔으니. 이는 힘을 합치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일을 끝마친 후 재목이나 식량을 갚지 못한 값과 목공이 품삯을 갚지 못한 것을 출연할 수 없는 것이 누백금(累百金)이었다. 절의 여러 스님들이 또 권선문(勸善文)을 내어 재물을 내어 갚기를 청하였다. 조금 후 묘익스님이 개탄하면서 이 절을 오늘 중수한 것은 우선 선사의 뜻이었으니, 선사의 토지가 약간 있어 소승에게 주었고 그 값으로 지금 갚지 못한 채무를 감당하다고 하였다. 곧 팔아서 모두 갚으니 여러 스님들이 잘 했다고 칭찬하여 감히 한말도 만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로써 묘익스님이 선사를 위하는 본뜻을 알았다.

이리하여 틈이 있으면 짚신을 신고 죽장을 짚고 동네에 들어가 기쁘게 법당을 보았는데, 옛날에 기울어 졌던 것이 날듯이 다시 높이 솟았다. 그 명칭은 중수한 것이지만 새로 지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처하는 스님이 20명이 되며, 내가 어려서 놀 때부터 보았지만 스님들의 많음이 이런 때가 없었다. 이리하여 기문을 썼다.

순조 신 묘년 겨울 농은(農隱) 이 진영(李 晉榮)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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