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齒牙)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 Kuwait Dental Center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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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齒牙)와 관련된 朝鮮王朝實錄 의 기록


자료출처 :-
조선왕조실록
자료입력 :- 2008-01-10
자료옮김 :- 임 충섭

1) 純附 1卷, 3年(1910 庚戌 / 일 명치(明治) 43年) 12月 7日(陽曆) 1번째기사
치아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 반종철이 오다

七日。【陰曆庚戌十一月初六日】 齒科醫飯塜徹入診。 以齒部靡寧治療也。
칠일。【음력 경술년(庚戌年) 11월 6일】 치과의(齒科醫) 반총철(飯塚徹)이 입진(入診)
하였다. 치아의 불편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원본】 6 책 1 권 10 장 b 면
【영인본】 3책 561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2) 純附 5卷, 7年(1914 甲寅 / 일 대정(大定) 3年) 7月 8日(陽曆) 1번째기사
치과의 요코야마 시게루에게 진료한 공로로 금시계를 하사하다

八日。 賜齒科醫橫山茂金時計一箇。 以入診勞也。
치과의(齒科醫) 요코야마 시게루〔橫山茂〕에게 금시계(金時計) 1개(箇)를 내렸다.
입진(入診)하여 수고하였기 때문이다.

【원본】 6 책 5 권 7 장 a 면
【영인본】 3책 581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3) 世宗 111卷, 28年(1446 丙寅 / 명 정통(正統) 11年) 3月 27日(甲午) 1번째기사
대렴하다. 전·빈소를 설치하고, 기일 전에 찬궁을 짓게 하다


○甲午/大斂:
內侍置大斂床于西階之西, 陳地衣褥席於床上, 先布絞之橫者五於下, 用白細紵布二幅, 裂 而爲六, 用其五。 次布縱者三於上, 用白細紵布一幅, 裂而爲三用之。 次布衾, 次布衣, 或顚或倒, 但取方正, 唯命服不倒, 摠九十稱。 擧之, 升自西階, 內人傳擧, 置于尸南乃遷。 朝夕〔奠〕, 內人盥手, 共擧尸遷于大斂床收衾, 先掩足, 次掩首, 次掩左, 次掩右, 取其方正結絞。 先以殺, 韜足而上; 後以冒, 韜首而下, 遂結七帶。 前期, 爛熟牀米灰鋪於棺內底四寸許, 加七星板於其上, 以厚(低)〔紙〕塗閉七星孔。 設褥席于板上, 乃擧棺入置殿中小西, 以斂餘衣裳, 量宜鋪于棺之底, 內人共擧尸納于棺。 又以衣裳鋪于尸上, 務令平滿。 將生時所落髮及所剪爪盛于小帒, 實于梓宮內四隅。 王世子憑哭盡哀, 大君以下及公主以下哭盡哀。 王世子及大君以下退, 次公主以下皆退, 次內侍召匠, 加蓋漆而三衽。 衽以木爲之, 其形兩頭廣, 中央小。 先鑿棺邊兩頭及中合處作坎形, 以衽連之, 令固底蓋相合處, 相合外面, 以漆涂之。 又以白綃束之, 縱橫覆以棺衣。 乃設奠, 遂殯于時御所西廳。 前期, 作攢宮于正殿中, 依北向南。【首陽大君第之西廳, 以廳之向背爲東西南北也。】預量梓宮平牀長廣, 四面各加闊一尺五寸, 先以甎鋪地, 石灰塗其隙, 作攅宮基址。 次設地方木, 竪四柱於其上, 架樑拘椽, 作壁如屋之狀, 唯虛其東壁, 以竹簟貼其內。 三面及上, 用片竹縱橫挾之, 以釘釘之, 牢固爲度。 又以厚紙塗之, 以紙畫朱雀玄武靑龍白虎, 隨方貼之。 其外三面與上面, 先以泥塗之, 次塗正布, 次塗厚紙, 鋪油芚地衣于內。 設無足平牀, 施竹簟及褥席于其上。 時至, 內侍奉梓宮安於牀上南首, 覆以棺衣後, 以油芚重裹用白正布縱橫束之。【內侍一人奉香卓前導, 次二人奉魂帛遺衣函及交倚, 次一人奉銘旌, 次二人奉冊寶。 內侍共擧梓宮乃行, 王世子及大君以下隨之。 就殯殿, 王世子及大君以下退次。】預作東壁機, 乃塞之加釘, 務令牢固。 泥塗之, 內外塗排如上。 設白綃滿頂及白綃帳於外,【欲具深邃也】復設靈牀於攢宮之東南, 南向;【設滿頂置牀褥席屛抭衣被之屬于內, 南首。 朝夕設盥櫛之具, 皆如平時。】設靈座於攢宮之西南南向,【設平牀褥席及屛, 置交倚于褥席上, 安魂帛遺衣函於交倚上。】奉銘旌立於靈座之右, 置冊寶案于靈座東南, 設蓋扇各二於靈座前左右,【蓋扇皆用白紵布, 蓋制一簷。】乃設奠。【攸司具饌以進, 尙食帥其屬, 傳奉奠于靈座前, 設香爐香合幷燭, 又設尊於戶外之左, 置盞三於尊所。 王世子入就殯殿戶外之東, 西向哭盡哀。 大君以下在其後, 重行西向南上俯伏, 公主以下就戶外之西, 重行東向上坐, 俱哭盡哀。 尙食詣香案前上香, 又酌酒三盞, 連奠于案。 戶外常設帷, 曲折以隔西東。】內人侍殯平時禮。 王世子還喪次, 大君以下及公主以下, 各歸喪次。

대렴(大斂)하였다.
내시가 대렴상을 서계의 서쪽에 두고, 지의(地衣)와 욕석(褥席)을 상위에 진열하고는, 먼저 염매의 횡포 다섯 개를 아래에 펴되, 백세저포 두폭을 찢어 여섯 개로 만들어 그 다섯 개만 쓰고, 다음은 염매의 종포(縱布) 세 개를 위에 펴되, 백세저포 한 폭을 찢어 세 개를 만들어 쓰고, 다음은 포금(布衾), 그 다음은 포의(布衣)인데, 혹은 뒤집어 놓기도 하고, 혹은 거꾸로 놓기도 하되, 다만 방정(方正)만을 취하고, 오직 명복(命服)만은 거꾸로 놓지 않으며, 합계 90칭(稱)이다. 이를 들고 서계로 올라가매, 나인이 받아 들어 시체의 남쪽에 둔다. 이에 조석전(朝夕奠)을 옮기고, 나인이손을 씻고 함께 시체를 들어 대렴상으로 옮기고는 금(衾)을 거두어 먼저 발[足]을 가리우고, 다음은 머리를 가리우고, 다음은 왼쪽을 가리우고, 다음은 오른쪽을 가리우되, 그 방정함을 취한다. 염매를 잡아매되 먼저 끝[殺]으로써 발을 감추고 올라가며, 뒤에 덮개[冒]로써 머리[首]를 감싸고 내려와서, 마침내 일곱개의 띠[帶]를 잡아맨다. 기일 전에 아주 부드러운 재를 관(棺) 안의 밑에 4촌 가량 펴고, 칠성판(七星板)을 그 위에 놓고, 두꺼운 종이로써 칠성판의 구멍을 발라서 막고, 욕석을 칠성판 위에 설치하고, 이에 관을 들고 들어와서 전중(殿中)의 조금 서쪽에 두고, 염하고 남은 의상(衣裳)은 적당히 관의 밑바닥에 펴고, 나인이 함께 시체를 들어 관에 들여넣으며, 또 의상을 시체 위에 펴되, 편편하게 꽉 차게 하고, 생존할 때의 빠진 치아(齒牙)·모발(毛髮)과 깎은 손톱·발톱을 소대(小帒)에 담아서 재궁 안의 네 모퉁이에 채운다. 왕세자가 기대어 통곡하기를 슬피 하고, 대군 이하와 공주 이하가 통곡하기를 슬피 한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자리[次]로 물러가고, 공주 이하도 모두 자리로 물러간다. 내시가 장인(匠人)을 불러 뚜껑을 덮고 옻칠을 하고서 나비은살대[衽] 세 개를 끼운다. 나비은살대는 나무로써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양쪽 머리가 넓다. 먼저 관 가의 양쪽머리과 중앙의 합치는 곳[合處]을 뚫어서 움푹 패인 모양[坎刑]을 만들고는 나비는 살대로써 이를 연결시켜, 밑과 뚜껑이 서로 합친 곳을 튼튼하게 하고, 서로 합친 외면(外面)에 옻칠로써 이를 바르고, 또 흰 생초(生綃)로써 가로세로[縱橫] 이를 묶고는 관의(棺衣)로써 덮는다. 이에 전(奠)을 설치하고, 드디어 시어소(時御所)의 서청(西廳)에 빈소(殯所)를 설치한다. 기일 전에 찬궁(欑宮)을 정전(正殿)안에 지어, 북쪽에 의거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는데,【수양 대군(首陽大君) 집의 서청(西廳)인데, 청(廳)의 앞과 뒤로써 동서 남북으로 삼다. 】 재궁 평상(梓宮平牀)의 길이와 넓이를 미리 헤아려 사면에 각각 1척(尺) 5촌(寸)을 더 넓도록 하고, 먼저 벽돌로써 땅에 펴고 석회(石灰)로써 그 틈을 발라서 찬궁의 기지(基址)를 만들고, 다음에 땅에 네모진 나무를 설치하고, 네 개의 기둥을 그 위에 세우고는, 들보를 걸치고 서까래를 걸어 벽을 만들어 집 모양과 같이 하되, 다만 그 동쪽 벽만을 비워서 대자리[竹簟]로써 그 안의 삼면(三面)과 위에 붙이고, 편죽(片竹)을 사용하여 가로세로 못[釘]을 끼우되, 못의 튼튼한 것으로써 한도로 삼고, 또 두꺼운 종이로써 이를 바르되, 종이로써 주작(朱雀)·현무(玄武)·청룡(靑龍)·백호(白虎)를 그려서 방위에 따라 이를 붙이고, 그 외의 삼면과 상면(上面)에는 먼저 진흙으로써 바르고, 다음은 정포(正布)를 바르고, 그 다음은 두꺼운 종이를 바르며, 유둔(油芚)과 지의를 안에 펴고발 없는 평상[無足平牀]을 설치하고 대자리[竹簟]와 욕석을 그 위에 펴 놓는다. 시각이 되자, 내시(內侍)가 재궁(梓宮)을 받들어 평상위에 안치(安置)하되,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관의(棺衣)로써 덮은 뒤에 유둔(油芚)으로 거듭 싸고, 흰 정포를 사용하여 가로세로 이를 묶는다.【내시 1인은 향탁(香卓)을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다음 2인은 혼백(魂帛)·유의함(遺衣函)과 교의(交椅)를 받들고, 다음 1인은 명정(銘旌)을 받들고, 다음 2인은 책보(冊寶)를 받들고, 내시가 함께 재궁을 들고 그제야 간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이를 따라 빈전에 나아갔다가 왕세자와 대군 이하가 자리[次]로 물러나온다. 】 미리 동벽기(東壁機)를 만들어 이를 막아 못을 치되, 튼튼하게 하고, 진흙으로 안팎을 바르고 도배(塗排)하기를 위와 같이 한다. 백초 만정(白綃滿頂)과 백초 장막[白綃帳]을 설치하고,【그것을 깊숙이 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 다시 영상(靈牀)을 찬궁의 동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만정(滿頂)을 설치하여 평상·욕석·병풍·베개·의복·이불의 등속을 그 안에 두되, 남쪽으로 머리를 두게 하고, 조석(朝夕)으로 낯을 씻고 머리를 빗는 도구를 설치하되, 모두 평상시와 같게 한다. 】 영좌(靈座)를 찬궁의 서남쪽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평상·욕석과 병풍을 설치하고, 교의를 욕석 위에 두고, 혼백과 유의함을 교의위에 안치하였다. 】 명정을 받들어 영좌의 오른편에 세우고, 책보안(冊寶案)을 영좌의 동남쪽에 두고, 덮개[蓋]와 문짝[扇] 각각 두 개를 영좌 앞 좌우에 설치하고,【덮개와 문짝은 모두 백저포(白苧布)를 사용하고, 덮개의 제도는 한 처마[簷]이다. 】 이에 전을 차려 놓는다.【유사(攸司)가 찬(饌)을 갖추어 올리면, 상식(尙食)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이를 전해 받들어 영좌 앞에 드린다. 향로·향합과 초[燭]를 설치하고, 또 준(尊)을 지게문 밖[戶外]의 왼쪽에 설치하고, 술잔 3개를 준소(尊所)에 둔다. 왕세자가 들어와서 빈전(殯殿) 지게문 밖의 동쪽에 나아가서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여 슬픔을 다하고, 대군 이하는 그 뒤에 겹줄로 하여 서쪽을 향하되, 남쪽을 위로 하여 부복하고, 공주 이하는 지게문 밖의 서쪽에 나아가서 겹줄로 하여 동쪽을 향하고 자리에 올라가서 모두 통곡하여 슬픔을 다한다. 상식이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서 상향(上香)하고, 또 술 석 잔을 따라 연달아 안(案)에 드린다. 지게문 밖에는 상시 장막을 설치하여 꼬불꼬불하게 해서 서쪽과 동쪽을 가로 막았다. 】 나인(內人)이 빈소(殯所)를 모시기를 평상시의 예절과 같이 한다. 왕세자가 상차(喪次)로 돌아오고, 대군 이하와 공주 이하가 각기 상차로 돌아온다.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24장 A면
【영인본】 4책 660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4) 文宗 1卷, 卽位年(1450 庚午 / 명 경태(景泰) 1年) 3月 5日(己酉) 2번째기사
성균관 생원 탁중 등이 불사의 혁파를 상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다

○成均生員卓中等上書曰:
臣等竊觀《書》曰: “愼厥終, 惟其始。” 《詩》曰: “靡不有初, 鮮克有終。” 雖有其始, 而或無其終者有之, 未有無其始而能善終者也。 在昔唐之憲宗, 勵精于始, 號稱賢君, 而終迎佛骨, 梁之武帝, 始雖勤於政事, 終有侫佛之惑, 臣等不知惟此二君, 永孚于休乎。 在我朝太祖康獻大王, 應天開國, 鑑高麗事佛之禍, 首革內願堂, 以新耳目。 太宗恭定大王, 嗣守丕基, 盡革寺社, 收其土田臧獲, 以充軍需。 惟新陟王, 善繼善述, 禁建佛宇, 命罷新造, 且令僧徒, 不得出入城市, 童稚之輩, 勿許削髮, 邪妄之根, 幾乎絶矣。 迨其末年, 憂患之極, 事佛漸勤, 臣等竊深惜也。 今我主上殿下, 承付托之重, 卽政臨民, 雖在憂服之中, 此正惟新厥德, 謹終于始之日也。 乃於更始之初, 首惑異端之說, 或造佛禁中, 或焇金寫經, 以至營建佛刹, 燔造珠珞, 刻意事佛, 靡所不爲, 一國臣民更始之望缺矣, 不識殿下, 此何意也。 夫王宮, 禮法之所在, 而四方之取則者也。 乃命工匠, 聚諸宮掖, 督成佛像, 泥金華飾, 使彼凶邪之物, 羅列左右, 是則王宮, 髣髴乎桑門矣。 又命儒臣, 磨金寫經, 使妖誕不經之說, 傳之不刊, 是夷狄之敎, 大張而莫遏矣。 臣民之觀聽, 將何在乎? 臣恐不數年間, 擧國臣子, 必爲沙門之弟子矣。 而況金銀, 非我國所産, 上國之貢, 旣已請免, 豈可費於無用之地乎? 雖五尺童子, 必知其不然矣, 殿下何不思之甚也? 傳曰: “臧文仲, 居蔡, 山節藻梲, 何如其智也?” 是雖不害於事, 君子以爲不智。 矧今殿下, 當圖政銳意之初, 命工鳩材, 改創大慈, 將使棟宇凌空, 華彩炫耀而後已, 人謂殿下, 以爲智乎? 臣等又聞燔造彩玉, 纓絡燈籠, 以極華侈之飾, 求媚於佛, 非特有童心, 弊將莫救矣。 昔在宋朝, 有臣蘇軾, 上書皇帝, 請罷燈籠, 尋蒙停罷之命。 又在我朝大行大王, 特設佛事, 欲作燈籠, 政府大臣, 進諫蒙允。 以此觀之, 燈籠之事, 雖若小矣, 其弊不可不慮也。 夫彩玉, 必以焰硝燔之, 焰硝將用於火炮, 而禦敵也。 故國家不惜民力, 每歲煮取, 委差相望於道路, 人民搔擾於中外。 然則所係至重, 而功亦不細矣。 肆我大行大王, 灼知其弊, 禁燔彩玉, 誠美意也。 今殿下, 不念先君之志。 輕費焰硝之重, 如有不虞之變, 則將何以應之? 臣等竊意殿下, 所以致意於此者, 不過爲父王修冥福, 以致其孝也, 臣等以爲盡孝之道, 不在於事佛, 而在於培植邦本, 不墜祖宗之緖也。 我國家, 三面受敵, 平時備禦, 尙不可緩。 況今達達, 陵犯中國, 天子北幸, 虐焰未息, 勢將及我。 且滿住讎我國家, 報復之心, 未嘗忘也。 至於島夷, 雖曰賓服, 而詐諼之謀, 誠不可測。 玆皆敵國外患, 不可苟安而忽易也。 加以比年以來, 飢饉荐臻, 國無九年之蓄, 民無擔石之儲。 此正殿下, 務農重穀, 節用愛人之秋也, 乃何造佛寫經, 燔珠建寺, 虛費國用, 重困民力乎? 所謂時屈擧贏者也。 當此之時, 若有外患, 則士卒糧餉之費, 恐不可支也。 若財匱民困, 馴致其極, 則邦本搖而宗社危矣, 其於繼述之孝, 何如? 臣等又謂, 居倚廬之時, 所當急務者, 葬事而已。 佛宇之役, 何補於治, 而汲汲於三農之日乎/ 所謂放飯流歠, 而問無齒決, 不能三年之喪, 而緦小功之察也。 若夫佛氏之害, 奚待臣言之贅, 姑擧目擊之事, 敢陳瞽說, 伏惟聖裁。
承旨鄭而漢, 見臺諫、集賢殿、成均館及三館生員等, 上書請罷, 而上猶不允, 遽作色而言曰: “上方哀痛迫切, 而爲之, 諸臣何煩擾上聰乃爾?” 鄭昌孫聞之曰: “此人, 曾已染血於齒牙矣。” 以而漢, 務爲阿諛, 位至承旨故云。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탁중(卓中)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서경(書經)》에는 ‘그 종말을 근실할진대 그 시초부터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시경(詩經)》에는 ‘시초는 없지 않으나, 종말이 있음은 드물다.’고 하였는데, 비록 그 시초는 있더라도 혹은 그 종말이 없는 이가 있으며, 그 시초가 없이 능히 종말을 잘 하는 이는 없습니다. 옛날 당(唐)나라 헌종(憲宗)은 시초에는 정치에 정성을 다하여 현군(賢君)이라고 호칭(號稱)하였는데도 종말에는 불골(佛骨)131) 을 맞이하였으며,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시초에는 비록 정사에 부지런하였는데도 종말에는 부처에게 빠져서 미혹(迷惑)되었으니, 신 등은 이 두 군주가 태평을 길이 누리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 있어서도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천명(天命)에 따라 나라를 세웠는데, 고려(高麗)의 부처를 섬긴 화(禍)를 거울삼아 맨먼저 내원당(內願堂)132) 을 혁파(革罷)하여 〈세상 사람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였으며,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는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여 지키면서 사사(寺社)를 모두 혁파(革罷)하고 그 토지와 노비(奴婢)를 거두어 들여 군수(軍需)에 충당하였습니다. 새로 승하(昇遐)하신 임금[世宗]께서도 전대(前代)를 잘 계술(繼述)하여 불당(佛堂) 세우는 것을 금지시키고 새로 불당 짓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또 중들로 하여금 성시(城市)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머리 깎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사망(邪妄)의 근원이 거의 끊어졌는데, 그 말년(末年)에 와서는 우환(憂患)이 극도에 도달하여 부처 섬기기를 점점 근실히 하였으니, 신 등은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지금 우리 주상(主上) 전하께서는 중대한 부탁(付託)을 받아 왕위에 올라 백성을 다스리시니, 비록 우복(憂服)133) 중에 계실지라도 이때는 바로 그 덕을 새롭게 하여 종말을 시초부터 근신해야 할 시기입니다. 이에 정치를 고쳐 다시 할 초기에 맨 먼저 이단(異端)의 설(說)에 미혹(迷惑)되어 혹은 금중(禁中)134) 에서 불상(佛像)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금을 녹이어 불경을 베껴 쓰기도 하며, 불찰(佛刹)을 건조(建造)하고 구슬을 구워 제조하기까지 하여 애써서 부처를 섬기되 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정치를 고쳐 시작하려는 희망이 없어졌으니, 전하의 이것이 무슨 뜻인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왕궁(王宮)은 예법(禮法)이 있는 곳이며 사방이 취해서 본받는 것인데도 이에 공장(工匠)에게 명하여 궁액(宮掖)135) 에 모아서 독려하여 불상(佛像)을 만들고, 이금(泥金)으로써 화려하게 장식하여 저 흉사(凶邪)의 물건으로 하여금 좌우(左右)에 나열(羅列)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왕궁(王宮)이 상문(桑門)136) 에 방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금을 갈아 불경을 베껴 쓰게 해서, 요망 허탄하여 도덕에 어긋난 설(說)로 하여금 영구히 없어지지 않도록 전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적(夷狄)의 교(敎)가 크게 성하여 막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신민(臣民)의 시청(視聽)이 장차 어디 있겠습니까? 신은 수년(數年)이 되지 않은 동안에 온 나라 신자(臣子)들이 반드시 사문(沙門)의 제자(弟子)가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더구나 금은(金銀)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중국(中國)의 공물(貢物)도 이미 청하여 면제되었으니, 어찌 쓸모가 없는 곳에 소비하겠습니까? 비록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반드시 그것이 옳지 않은 줄을 알게 될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지 않으심이 그다지도 심하십니까? 전(傳)137) 에 이르기를, ‘장문중(臧文仲)138) 이 대귀(大龜)139) 를 저장하는 집에, 주두(柱頭)의 두공(斗栱)에 산을 새기고 양상(梁上)의 단주(短柱)에 수초(水草)를 그렸으니, 어찌 그것이 지혜가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정사에는 해롭지 않더라도 군자(君子)140) 가 지혜롭지 못하다고 인정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전하께서는 정치에 정성을 써서 마음을 단단히 차려야 할 초기에 당해서 공장(工匠)에게 명령하여 재목을 모으게 해서 대자암(大慈庵)을 고쳐 지어 장차 동우(棟宇)를 공중에 높이 솟게 하고 화채(華彩)141) 를 번쩍번쩍 빛나게 한 후에야 그만둔다면, 사람들이 전하를 평하되 지혜 있는 분이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신 등이 또 듣건대 채옥(彩玉)을 구워 만들고 등롱(燈籠)은 구슬로 둘러서 화려하고 사치한 장식을 극도로 해서 부처에게 아첨을 구하니, 다만 동심(童心)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폐단을 장차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에 송(宋)나라 조정에 소식(蘇軾)142) 이란 신하가 있었는데, 황제에게 상서(上書)해서 등롱(燈籠)을 폐지할 것을 청하여 조금 후에 정파(停罷)하라는 명령을 받았었습니다. 또 우리 조정에 있어서도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특별히 불사(佛事)를 베풀어 등롱(燈籠)을 만들고자 하니 정부의 대신(大臣)들이 나아가 간(諫)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이 일로써 미루어 본다면 등롱(燈籠)의 일은 비록 작은 것 같지마는, 그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채옥(彩玉)은 반드시 염초(焰硝)로써 굽게 되는데, 염초(焰硝)는 장차 화포(火砲)에 사용하여 외적(外敵)을 방어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국가에서는 백성의 힘을 아끼지 않고서 해마다 구워 만들므로, 위차(委差)143) 가 도로(道路)에서 앞뒤에 서로 끊어지지 않고 잇따라서 인민(人民)이 중앙과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니, 그렇다면 관계된 바가 지극히 무겁고 사공(事功)도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그 폐단을 환하게 알아서 채옥(彩玉)을 굽는 것을 금지시켰으니, 진실로 훌륭한 뜻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군(先君)의 뜻은 생각하지 않으시고 염초(焰硝)의 소중함을 가벼이 소비하시니, 만약 뜻밖의 변고가 있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대응(對應)하겠습니까?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이 일에 마음을 쓰는 까닭은 부왕(父王)을 위하여 명복(冥福)을 빌어서 그 효성을 이루는 데 불과할 뿐인데, 신 등은 생각하기를, 효성을 다하는 도리는 부처를 섬기는 일에 있지 않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培養)하여 조종(祖宗)의 사업을 실추(失墜)시키지 않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가는 삼면(三面)에 외적(外敵)의 침입을 받고 있으니, 평상시에 미리 준비하여 방어하는 것도 오히려 늦출 수가 없는데, 하물며 지금 달달(韃靼)144) 이 중국에 침범하여 천자(天子)가 북방으로 행차하였으며, 포악한 기세가 그치지 않으므로 형세가 장차 우리에게 미칠 것이며, 또 이만주(李滿住)는 우리 국가를 원수로 여겨 보복할 마음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섬 오랑캐까지도 비록 복종하였다고 하지만, 간사하고 속이는 계책은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것이 모두 적국 외환(敵國外患)이므로 구차스럽게 편안을 도모하여 소홀히 하고 업신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근년 이래로 기근(飢饉)이 거듭 이르게 되어서 나라에는 9년 동안을 유지할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한 섬을 담을 저축이 없으니, 이때는 바로 전하께서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고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할 시기인데, 어찌 불상(佛像)을 만들고 불경을 베껴 쓰고 구슬을 구워 만들고 절을 세워서 국가의 재용(財用)을 헛되이 소비하고 백성의 힘을 거듭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까? 이른바 시기는 궁곤(窮困)한데 행사(行事)는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만약 외환(外患)이 있으면 사졸(士卒)의 군량(軍糧)의 비용을 아마 지탱하지 못할 듯합니다. 만약 재용(財用)이 없어지고 백성이 곤궁하여 점점 그 극도에 이르게 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종묘(宗廟)·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될 것이니, 그것이 전대(前代)를 계술(繼述)하는 효도에 어찌되겠습니까?
신 등은 또 생각하기를, 여막(廬幕)에 거처할 때에 마땅히 시급히 할 일은 장사(葬事)뿐인데 불당(佛堂)의 역사(役事)는 무엇이 정치에 도움이 되기에 삼농(三農)145) 의 시기에 서두르고 계십니까? 이른바 방반 유철(放飯流歠)하면서 〈물고기를〉 이빨로 끊어 먹지 아니함을 물으며, 3년의 상복(喪服)을 입지 않으면서 시마(緦麻)·소공(小功)의 상복을 살피는 격(格)입니다. 대저 불씨(佛氏)의 해독은 어찌 신(臣)의 쓸데없는 말을 기다리겠습니까마는, 우선 눈으로 직접 본 일을 들어서 감히 몽매(蒙眛)한 소견을 말씀드리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가(裁可)하소서.”
승지(承旨) 정이한(鄭而漢)은 대간(臺諫)·집현전(集賢殿)·성균관(成均館)과 삼관(三館)의 생원(生員) 등이 상서(上書)하여 정파(停罷)하기를 청하였는데도 임금이 오히려 윤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문득 얼굴을 붉히어 말하기를,
“성상께서 바야흐로 애통하고 박절하여 이 일을 하시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찌 임금의 총명을 번거로이 소란하게 하기를 이같이 하는가?”
하니, 정창손(鄭昌孫)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이미 이빨에 피를 물들였구나.”
하였다. 정이한(鄭而漢)이 아첨하기에 힘써서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게 되었던 까닭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8장 B면
【영인본】 6책 223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왕실-국왕(國王) / *출판(出版) / *재정(財政) / *정론(政論) / *역사(歷史) / *건설(建設)


[註 131]불골(佛骨) : 불사리. ☞
[註 132]내원당(內願堂) : 궁내에 설치하여 임금이나 왕가(王家)에서 불도를 닦던 불당(佛堂). 내도량(內道場). ☞
[註 133]우복(憂服) : 상복(喪服). ☞
[註 134]금중(禁中) : 궁중(宮中). ☞
[註 135]궁액(宮掖) : 궁궐. ☞
[註 136]상문(桑門) : 사문(沙門)의 전음(轉音). ☞
[註 137]전(傳) : 《논어(論語)》. ☞
[註 138]장문중(臧文仲) :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 ☞
[註 139]대귀(大龜) : 나라의 점치는 데 쓰이는 큰 거북. ☞
[註 140]군자(君子) : 공자(孔子). ☞
[註 141]화채(華彩) : 화려한 색채. ☞
[註 142]소식(蘇軾) :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문인(文人).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 ☞
[註 143]위차(委差) : 책임을 맡은 사역인. ☞
[註 144]달달(韃靼) : 몽고족의 한 갈래. ☞
[註 145]삼농(三農) : 봄에 밭을 갈고[春耕] 여름에 김매고 [夏耘] 가을에 거두는 것[秋收]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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