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립(金宗立)은 진천 사람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를 일으키자 진천현의 초관으로 적과 싸우다 험천에서 전사하였다. 내고향 충북 진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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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환여승람에 기록된 진천사람 김종립(金宗立) 

자료출처 : 朝鮮寰輿勝覽
자료생성 :- 2014. 03. 22
자료옮김 :- 임충섭(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김종립(金宗立)은 진천 사람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를 일으키자 진천현의 초관으로 적과 싸우다 험천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진천현감 이충운(李翀雲)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손에 붓대를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는 재주가 달랐도다. 그대가 나라 일로 죽을 때 나는 구차하게 살았으니, 임을 향하는 뜻이 서로 같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네”라는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

진천의 진사 채진형(蔡震亨)이 김종립의 순절에 대한 전기(傳記)를 매우 상세하게 지었으나, 나라에서 내리는 은전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1704년(숙종 30) 손자 김문상(金文商)이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자, 충청북도에 명을 내려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조사 결과 김종립의 죽음이 명백하게 밝혀짐으로써 정려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음성군 문화유적』 등에는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봉사·군자감주부를 역임하였고, 정려 현판에도 ‘행통훈대부군자감주부’라 하여 직명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1624년 증광시 무과 급제자 50명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고, 진천현 초관(종9품 무관직)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기록과는 상반된다. 한편 『기년편고(紀年便攷)』에는 무과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숙종 40권, 30년(1704 갑신 / 청 강희(康熙) 43년) 8월 27일(갑오) 1번째기사


고 출신 김종립의 문에 정표하다

() 출신(出身) 김종립(金宗立)의 문()에 정표(旌表)하였다. 김종립은 진천(鎭川) 사람으로 병자년12631) 의 호란(胡亂)에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온 도의 군사를 독려하여 들어와 구원하였는데, 김종립이 본현(本縣)의 초관(哨官)으로서 정세규를 따라 험천(險川)에 이르러 전사(戰死)하였으니, 그 때의 현감(縣監) 이충운(李翀雲)이 시()를 지어 애도(哀悼)하기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輕生初志爾吾同,
손에 붓대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 재주는 달랐도다.  握管腰弓技不同。
그대가 나라 일에 죽을 때에 나는 구차하게 살았으니,        爾死國時吾苟活,
남을 향해 뜻이 서로 같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네.”              向人羞道志相同.”

하였다. 본현의 진사(進士) 채진형(蔡震亨)이 전기(傳記)를 지어서, 그 순절(殉節)의 일을 기록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으나, 난리 뒤에 포장(褒裝)의 은전(恩典)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 손자 출신(出身) 김문상(金文商)이 상언(上言)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므로, 일을 본도(本道)에 내리고, 핵실(覈實)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는데, 그 죽음이 명백(明白)하다 하여 정려(旌閭)12632) 하도록 특별히 명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7장 B면
【영인본】 40책 103면
【분류】 *윤리(倫理) / *외교-야(野)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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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旌表故出身金宗立之門。 宗立, 鎭川人也。 丙子之亂, 忠淸監司鄭世規, 督一道軍入援, 宗立以本縣哨官, 隨世規險川戰死。 其時縣監李翀雲, 作悼之曰: “輕生初志爾吾同, 握管腰弓技不同。 爾死國時吾苟活, 向人羞道志相同。” 本縣進士蔡震亨爲立傳, 記其殉節之事頗詳, 而亂後褒奬之典, 不及。 至是, 其孫出身文商, 上言訟冤, 事下本道, 覈實以聞, 以其死明白, 特命旌閭。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7장 B면
【영인본】 40책 103면
【분류】 *윤리(倫理) / *외교-야(野)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손자는 김문상(金文商)이다.

[활동사항]
김종립(金宗立)[?~1636]은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서 주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진천현 초관(哨官)으로서 충청감사 정세규를 따라 광주(廣州) 험천(險川)에서 적과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정세규를 찾으려 할 때 한 장교가 “지금 나와 같이 도망하여 이 위급을 피하자”하였으나, 정색하며 “네가 만일 도망을 가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하면서 남은 병사를 정돈하여 분신전진(奮身前進)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현감 이충운(李翀雲)이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손에 붓대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 재주는 달랐도다/ 그대가 나라 일에 죽을 때에 나는 구차하게 살았으니/ 남을 향해 뜻이 서로 같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네”라고 하였다.

진사 채진형(蔡震亨)이 전기(傳記)를 지어 김종립의 충절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나 조정에서의 포상이 없었다. 1704년(숙종 30) 손자 김문상이 상언하자, 조정에서 김종립의 충절을 인정하여 정려(旌閭)를 명하고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증직하였다. 이듬해인 1705년(숙종 31)에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에 ‘충신정려문’을 건립하였으며,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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