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현 야고버 수사 * 사랑의 인술, 우리시대 ’히포크라테스’ 가톨릭 신자입니다.

좌측의카테고리항목을 크릭하시면 많은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신상현 야고버 수사 * 사랑의 인술, 우리시대 ’히포크라테스’

자료출처 :- http://blog.hani.co.kr/demiankmk/484 
자료생성
 :- 2005/12/26 17:06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신상현 야고버 수사 * 사랑의 인술, 우리시대 ’히포크라테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이 모퉁이에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 시편 11822

 

칼바람 매섭던 198911, 겨울의 어느 한 자락.

음성 꽃동네 함박산 중턱에 있는 성모상 앞에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다.

1.

 

 

인적이 끊긴지 오래인 그 곳에는 정적을 가르는 바람소리만 간간이 윙윙대고 있다.

사내는 움직일 줄 모른다. 시간이 흐른다. 흐르는 시간의 깊이만큼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 그러나 사내는 석상(石像)이 된 듯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사내의 얼굴에는 시간의 깊이도, 엄동설한의 위세도 찾아볼 수 없다.

무념무상의 평화.

 

 

모두들 잠든 이 깊은 산중의 오둠 속에서 사내가 두 손 모아 염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꽃동네 사람들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았던, 마치 비화밀교(秘火密敎)의 의식처럼 은밀했던 사내의 기도는 무릎까지 빠지는 폭설에도 계속됐고, 물 오른 버들개의 풋풋한 향내 속에서도 이어졌으며 소쩍새 울음소리 난분분 어지럽던 여름날까지 끊이지 않았다.

 

 

89년 겨울의 초입에서 으듬해 7월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사내의 기도. 진정 그가 염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이토록 그에게 간절한 소망을 갈구하게 만들었는가.

 

신상현 야고버 수사(42·인곡자애병원 부원장)9개월간 새벽 1시에 매일처럼 꽃동네 함박산 성모상을 찾아 기도를 드렸던 이다.

 

 

신수사의 소망은 그로테스크하다.

에이즈(AIDS)에 걸려 죽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꽃동네에 언젠가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에이즈 환자들을 들여와 이 곳이 그들의 심신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게 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소망이고, 그 환자들을 치료하다 신수사 역시 그들처럼 에이즈에 걸려 그 고통을 같이 느끼며 살다 가는 것이 두 번째 소망이다.

 

 

"우리나라에도 앞으로 에이즈 환자가 급증할 것입니다. 에이즈는 인류 최악의 징벌이니, 하는 말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하고 죄악시 하는 부분인데요. 그렇지가 않아요. 그들의 죄는 그들의 죄가 아닙니다. 그들의 고통은 세상의 죄를 대신 걸머진 채 치르고 있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신수사는 5555일 음성군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숫자 5가 넷인 특이한 출생년도, 생일 잊어버리는 일은 없다.

신수사가 음성 꽃동네로 온 것이 서른 세 살 때인 88년이니, 신수사 나이 세 살 때 서울로 이사 간 것을 치면 꼭 3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자식이 귀했던 집안에서 부친 신태한씨(85년 작고)3대독자 외아들이었다. 부친은 어릴 때 조실부모하여 어렵게 자수성가했다. 방수(防水)관련 조그만 사업을 꾸려가던 부친은 성실과 근면, 검소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다.

신수사는 서울 동명초등학교와 경동 중·고등학교를 거쳐 80년 가톨릭 의대에 들어갔다.

 

 

당시 어려운 시절 탓에, 대개 가정이 그랬듯 신수사 가족도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을 싸지 못하면 수돗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도 있었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6년간 왕십리에서 보문동까지 10여리를 무겁고 두툼한 고생보따리를 들고 늘 걸어다니던 기억도 새롭다.

 

 

하루는 10여리 걸음에 셈을 놓으며 걸어보니 3500여 발자국이나 되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홀로 자란 부친은 결혼후 장인과 장모를 모셨다. 3개에 식구 7명 과 외조부·외조모까지 9명이 살았다.

 

 

신수사에게는 자신의 공부방이 없는 것이 여간 불만일 수 가 없었다. 외할머니 당신이 끼니 때마다 신수사에게는 더운 밥으로 올려주면서도 자신은 방바닥에서 찬밥이나 쉰밥으로 먹는 궁색한 모습도 불만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고서야 그네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신수사는 깨달았다. 그것은 신수사의 가슴에 큰 못으로 박혔다.

 

 

내성적인 성격의 신수사는 고교시절 문학과 사진을 좋아했다. 3학년 때에는 한양대에서 주최한 1회 전국 고교 사진콘테스트에서 대상으 차지했다. 신수사는 지금도 가끔 꽃동네 회지를 만드는 꽃동네 출판사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아 고교시절 닦았던 글을 낸다.

 

 

신수사는 부모는 몸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만성 십이지장 궤양에 시달렸고 아버지는 천식으로 고생했다.

부모의 고통을 지켜보며 신수사는 고통을 덜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숨 끊어지는 듯한 천식을 보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아버지는 신수사에게 눈물 젖은 노트를 건네주었다. 아버지의 고통을 보며 비몽사몽 잠들 무렵 "하느님 저희 아버지 제발 숨 좀 차지 않게 도와주세요"라고 신수사가 쓴 글이었다. 부친이 눈엔 얼핏 눈물이 맺혀있었다.

 

 

가톨릭의대에 들어간 신수사는 의과 4년을 거친후 본과2년 과정에 들어갔다. 당시 부친의 사업이 불황의 늪에 허덕이고 있을 때였다.

신수사는 공증보건 장학금을 신청했다.

그해 생긴 이 장학금제도는 돈을 받은 만큼 무의촌 의료봉사활등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친은 받지말라 했다. 당신의 힘으로 어떡하든 꾸려보겠다는 것이었다.

 

 

"아버님, 남은 2년은 제 힘으로 다니겠습니다."

 

 

신수사는 84년 영세를 받았다. 여동생과 친구들이 교리공부하자는 유혹을 신수사는 내심 반겼고, 성당에 신자로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해 4월에 공증보건 장학금제고가 풀려 신수사는 레지던트 과정을 받게 됐다.

8511월 평생 성실하게 생활해 온 부친이 폐암으로 결국 작고했다. 부친은 죽기 1주일전 신수사에게 "너는 이담에 꼭 남을 돕고 살아라"고 유언했다. 신수사 역시 의대에 들어가면서부터 무의촌이나 사회복지시설에서 의료봉사활동 할 것을 계획하고 있던 터였다.

 

 

신수사는 그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던 당시 이동모 지역의료과장을 찾아갔다.

 

 

"천주교 관활로 의사가 필요한 곳,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봉사하고 싶습니다."

 

 

이 과장은 그런 곳은 꽃동네 밖에 없다며 월급 300만원에 대한 예산이 잡혀있지 않아 꽃동네로 들어가는 건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월급 안 받으면 보내주겠습니까?" 신수사가 되묻자, 이 과장은 "미친 놈!"하면서 털털하게 웃었다. 이 과장은 담배 한 개비를 신수사에게 권한 후 "보사부 근무 수 십년만에 진짜 의사는 처음 보네"라며 또 털털하게 웃었다.

 

 

신수사의 하루는 늘 팽팽한 기타의 현처럼 긴장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오전 6시 새벽기도, 7시 식사, 그리고 오전 8오후 12시까지 병원 근무다. 혼자서 인곡자애병원을 꾸려나가다 보니 새벽 2시를 넘기기도 예사다.

 

 

365에브리 데이 당직은 기본

 

 

신수사가 하루 잠을 청하는 식간은 4시간5시간. 잠을 많이 자면 오히려 팽팽한 긴장감이 흐트러져 삶의 탄력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토 일주일에 3일간 받는 외래환자 50, 6층 내·외과 환자 50, 5층 호스피스병실 중환자 10, 결핵·정신병 환자 50, 신수사가 늘 하루 한 번 이상 회진하는 환자들이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생활로 병원 문밖 출입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신수사의 눈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다. 수사들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참 가치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부러움을 느꼈다.

 

 

내가 수사가 되면 수도원 다 망할 거야.’

신수사는 수사가 될 염()을 내지 못했다. 8911월 신수사는 기도를 시작했다. 수사가 될만한 재목은 아니지만 수사가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였다. 기도는 이듬해 7월까지 이어졌다. 병원 일을 끝내고 새벽 1. 2시에 시작되는 기도를 꽃동네 가족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느날 장님 유남식 할아버지를 진찰하는데 유 노인이 뚱딴지 같이 불쑥 얘기를 꺼냈다.

 

"신 선생님 수도원 입회하는 것 축하합니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신수사는 그때까지 그의 속내를 아무에게도 비친적이 없었다.

신수사에게 유 노인의 말은 하늘의 응답으로 들렸다. 신수사는 망설였다. 자신은 수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됐다. 수도원 입회가 있기 하루전, 1130. 이번엔 원감 수사가 수사에게 찾아왔다. 원감수사는 신씨에게 "수사가 되겠느냐"는 말은 생략한 채 "신선생, 내일 입회식 때 제1독서 읽으세요"라고 했다.

 

 

신수사는 897월 그가 그토록 조심스레 갈망하던 수사가 됐다.

신씨에게 수사가 되는 길은 어쩌면 내정 돼 있던 자신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수사는 인곡자애병원 환자들이 천국의 계단을 오르기 전 꼭 거쳐가는 평화의 문이다. 눈물겨운 사연을 간직한 많은 중증 환장들이 그를 거쳐 임종했다.

 

 

신수사는 그들의 죽음을 그리 슬퍼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천국의 계단을 잘 오를 수 있기를, 그 곳 세상에선 행복함만이 찾아들기를 기도할 뿐이다.

 

 

취재수첩

 

아들잃고 인공호흡기 기증한 어머니 사연

 

신수사의 손을 거쳐 저쪽 세상으로 간 고인(故人)들의 사연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 했더니, 신사사는 흔쾌히 허락했다.

불행했던 과거의 끈을 놓지 못했던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절망을 이기고 자신의 존재를 찾은 아름다운 이야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야기들.

 

 

신수사가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하루는 부산서 한 아주머니가 1000만원이나 되는 인공호흡기를 기증하러왔다. 그녀는 인공호흡기를 기증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사연을 물어보니 날 때부터 천식이 심했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쓰던 것이란다. 아들은 입과 코로 숨 쉬지 못할 만큼 천식이 악화 돼 목구멍에 구멍을 뚫고 넣은 호스를 통해 어린생명을 연장했다. 1년 넘기기가 힘들 것이라는게 의사들의 진단이었다.

 

 

그녀는 막막하게 아들의 병상을 지키다가 간호원들로부터 인공호흡 호스넣는 법 주사 놓는 법, 끓는 가래를 제거 하는 법 등 아들의 간병을 위한 모든 것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아들을 간병하겠다며 퇴원을 신청했다.

가래제거를 안해주고 조금만 시간이 지체되어도 아들은 질식사를 면할 길이 없었다.

1년을 못넘기리라던 아들은 5년을 더 살았다. 5년간 그녀는 단 1분도 아들 곁을 떠나기 못했다.

꽃동네에 호흡기를 기증하러 온 날이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뒤 5년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된 그녀의 첫 외출이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