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고열・김정자 부부 /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서 8년간 자원봉사 가톨릭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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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열・김정자 부부 /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서 8년간 자원봉사  

자료출처 :- http://blog.hani.co.kr/demiankmk/484 
자료생성
 :- 2005/12/26 17:06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박고열김정자 부부 /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서 8년간 자원봉사


안락한 노후 접고 스스로 택한 가시밭길

늦가을 저문 들녘의 풍경에는 잔잔한 감동이 숨겨져 있다.
사위어 가는 햇살과 서산 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이삭을 줍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거나, 허리춤 한 번 편채 은은히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묵상하는 풍경. 이런 모습에는 경건함이 있다. 만추(晩秋)의 저문 들녁 같은 인생의 교차로에서 달콤한 황혼기를 접어두고 이웃에 대한 봉사와 헌신의 길을 택한 부부가 있다.


박고열(63).김정자씨(57)부부가 그들이다. 이들 부부의 모습은 넉넉한 가을 들녁처럼 참 평화롭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웃사랑에 대한 마음이 풍성한 까닭이다.


왜 사냐는 질문에 ’그냥 웃지요’라는 어느 시인의 시가 아니어도 좋다. 평범한 듯 살아가면서도 결코 쉽게 살아낼 수 없는 희생의 길에 접어든, 가을 풀잎처럼 잔잔한 향기가 나는 박고열·김정자씨 부부 이야기는 반목과 질시, 이기와 문신주의가 팽배한 우리들 사회에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건강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냥 웃는’ 시인의 여유와 겸허보다 그네들 삶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기름지게 볼 수 있게 하는 풍부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박씨는 1934년 강원도 원주서 출생했다.
고등학교 시절 6·25가 터졌고, 박씨는 공군 병원에서 방사선 촬영업무를 보았다. 정전(停戰)이 되자 박씨는 경남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가 60년 졸업했다.


박씨는 전공한 경제학을 접어두고 군에서의 주특기를 살려 제1회 방사선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이들 부부가 만난 것은 62년이다. 당시 박씨는 군 복무중이었는데, 박씨의 하숙집 주인은 박씨의 무던하고 성실한 성품을 보고 매우 마음들어 했다.


어느날 주인이 박씨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름다운 아가씨가 함께 있었다. 후일 박씨에게 주인은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자신의 질녀뻘되는 처녀인데 어떠냐는 것이었다. 고운 얼굴만큼이나 고운 마음씨에 이미 박씨는 마음을 빼앗긴 터였다.
이들 부부는 62년 결혼했다.


행복한 삶의 출발이었다. 이때 이들 부부는 서로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나이 쉰살이 되면 남을 위해 살아가는 길을 택하자는 것이었다.
둘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누가 먼저였든 상관은 없다.
머리 희끗한 박씨와 아직도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이 은은히 배어있는 김씨의 기억 속에는 서로간의 약속이 통했다는 일치감이 중요했을 뿐.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갔다.
89
5월 온 누리가 봄의 축복으로 은성했던 어느날.
"
결혼할 때 약속을 지키지 못한지 5년이나 지났소.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겠소."
남편 박씨는 김씨에게 잘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남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자던 결혼때의 약속을 이제는 실행에 옮기자는 통보였다.


김씨는 내심 기뻤다. 이분은 우리들의 소중한 약속을 잊고 계신 것이 아니었구나. 용기있는 선택에 김씨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때 박씨 53세 김씨는 47세였다.
박씨 소유의 서울 구이동 조그만 상가에서 나오는 임대료는 넉넉지는 않지만 박씨 부부가 노년을 보내기는 적당했다.


이들 부부가 처음 계획했던 것은 경기도 청평서 전도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박씨는 주민들에 대한 의료봉사를 염두에 두고 침술면허까지 따내는 열성을 보였었다.
아내 김씨는 1주일에 두 번 서울 강남 성모병원과 성노 아기집을 드나들며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럴즈음 음성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이 개원했다는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인사차 들른 박씨에게 오웅진 신부는 자원봉사자로 일할 것을 권유했다.


박씨는 쾌히 승낙했다. 결혼 때의 약속은 이 곳에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 마련 돼 있었다는 숙명적인 느낌도 얻었다. 아내도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가지 걸림돌로 남는 것이 있었다. 대학입시준비를 하고 있는 외아들 의진을 혼자두고 가기가 영 쉽지 않았던 것이다.


박씨 부부는 서울서 음성 꽃동네까지 2년간 출퇴근 생활을 했다.
쉰줄을 넘어선 박씨에게 이러한 장거리 출퇴근은 힘겨운 일이었다. 몸이 많이 상했다. 잠자리와 음식 등 모든 게 불편했다. 그럴수록 박씨에게 시린 겨울에도 깊은 산속 작은 연못 송송송 솟구치는 물처럼 생겨나는 것이 있었다. 그 불편함을 자신이 선택했다는 소명감이었으며 자신의 불편함만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꽃동네 환자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쉽게 하지 못할 2년간의 강행군으로 박씨는 체중이 13kg이나 빠졌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자 이들 부부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주저없이 내려왔다. 꽃동네가 가까이 있는 충북 진천읍 신정리 장산아파트에 봉사를 위한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잔병치레가 많았고, 몸이 허약했던 아내 김씨는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생이 심하다. 의사로부터 서 있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엔 환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녀의 애착이 너무 크다. 김씨는 마음을 다잡고 인곡자애병원에 들어와 남편 박씨와 함께 꽃동네 자원봉사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 환자들은 대학병원서도 한달에 한 두명 만나기 힘든 중증 환자들이다. 폐가 반은 썩은 페결핵 환자, 치유하기 힘든 간경화 환자, 전신불수에 암환자들도 많다. 세상에 있는 병은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일반 환자들 촬영에는 10분정도 소요 되는데 비해 이들을 X-레이 활영하려면 30분은 족히 넘겨야 한다. 적합한 체위의 촬영을 위해 이리저리 위치를 교정하다 보면 손에 무엇인가 뭉클 잡히는 것이 있다. ’큰 일’을 본 것이다. 박씨의 면전에 가래침을 쏟아내며 기침을 하는 사람도 있다. 꽃동네에 입소하기 위해 이 곳에 들르는 환자들에게는 화장실 냄새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정신병동 할머니 한 분이 촬영을 위해 왔다. 이름까지는 정확하게 대답하는데, 연세가 몇이냐고 물으니 열 두 살이란다.


"열 두 살 맞아요?" 박씨가 되묻자 환자는 "열 세 살이던가?" 반문한다.
그러면 박씨에게는 칠순을 넘긴 이 할머니가 열 세 살의 소녀가 된다.
"
할머니는 열 세 살 소녀같아 좋겠어요."


그들의 마음만은 투명해 보인다. 적어도 박씨의 눈에는 그들이 그렇게 곱게 보일 수가 없다.
단아한 박씨의 책상에는 정갈한 그의 성품처럼 방사선 관련 전문 서적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방사선에 대한 새로운 학설과 학문의 깊이가 깊어 갈수록 박씨는 책과 씨름하는 날이 많아진다. 환자들에게 보다 정확하고 질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십자가상 밑에는 박씨 삶의 모토가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내 일도 내 일같이 남 일도 내 일 같이’
처음 방사선실로 들어온 환자들은 대개 들것에 실려 들어온다.


치료를 받은 몇 달후 이들은 이제 휠체어를 타고 들어온다. 거기서 몇 달후면 이들은 목발을 짚으며 걸어나간다. 역광을 받으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이들을 볼 때 박씨는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박씨는 황금빛 황혼의 여유를 접어두고 거친 가시밭 봉사의 길로 뛰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김정자씨의 하루는 늘 바쁘다.
오전엔 환자들을 위해 죽을 쑤고, 김치를 썰고, 나물을 다듬는다.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면 환자들이 기다리는 오후로 접어든다.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한지도 벌써 8년여. 김씨에게는 이들 환자가 친자식과 한가지다.

이런 김씨에게도 서운한 일은 있었다.
전신불수였던 한 환자를 자식같이 생각하고 돌봐 주었다. 고기를 가져다 주고, 과자도 주고, 손도 주무르고....


환자의 몸상태가 호전 돼 조금씩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그 환자는 고아원에서 자라 25년간 교도소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이 환자는 ’엄마’같은 김씨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해댔다. 김씨가 주물러 움직이게 된 손으로 김씨의 가슴을 쳤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환자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울리기로 소문난 ’악동’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환자에 대한 섭섭한 생각을 곧바로 돌렸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 하여 사랑을 받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 남을 사랑하는 방법은 더욱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


꽃동네 사람들은 괴팍스럽고 폭력적이었던 성질도 이내 온순하게 조화를 이루어간다. 김씨는 ’악동환자’도 그렇게 될 것으로 확신 한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비위가 상해 밥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던 김씨는 이제 자신있게 말한다.


"저는 지금 자원봉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에게 봉사를 한다는 것입니까. 환자들과 더불어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부터 꽉 찬 충만감. 저는 이 곳에 봉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우러 왔습니다."


◈취재수첩◈

"주님 뜻따라 어여쁜 삶 살고 싶어요"

8월이면 산달을 맞게 되는 며느리 권희련씨가 얼마전 시어머니 김씨에게 말했다.
"
어머니 저 아기 낳으면 좀 봐주세요."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가야, 네가 돌볼 아기는 하나지만 내가 돌볼 ’아기’는 수십명이야"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 빽빽한 하루 일과. 저녁을 먹은 뒤 박씨 부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린다.
박씨 부부가 쉬는 날은 토요일과 일요일.


그러나 이들의 꼼꼼하고 다정다감한 성미는 쉴 여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진천 부근 오지를 돌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 이제는 주례행사가 됐다. 무의탁 노인들과 극빈자들에게 라면도 들고 가고 과자도 사다준다.


진천성당 빈첸시오 단원들과 허물어진 집도 보수해 주고 어려운 이웃들과 어울리다 보면 또 하루해가 훌쩍 저물어 버린다. 그러나 박씨 부부는 이런 바쁜 삶이 좋다.
박씨 부부의 말 처럼 그들이 지향하는 삶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예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5 12 17, 박고열선생님께서 하느님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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