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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관련 기록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중


자료출처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중 / 괴설변증(怪設辨證)
자료생성 :- 2011. 04. 30.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동사강목 부록 상권 중
괴설변증(怪說辨證)

상고하건대 우리 나라에는 고대의 괴설(怪說)이 매우 많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 전대의 기록이 미비하여 일컬을 만한 일이 없음을 민망히 여겨서, 상도(常道)에 어긋난 속설을 취하여 정사(正史)에 엮어서 마치 실지로 그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기에, 내 이제 일체를 다 간정(刊正)하여 괴설변증(怪說辨證)을 짓는다.
○ 유씨(柳氏 형원(馨遠))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중국과 멀지 않으므로 풍기(風氣)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였는데, 삼국(三國)의 개국이 한 선제(漢宣帝) 이후라, 중국의 고대와는 매우 동떨어지니, 어찌 기화(氣化)와 변동이 우리 나라 역사에서 일컫는 바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 대개 삼국은 그 문헌(文獻)을 상고할 수 없으므로 저 무지(無知)한 자가 거짓말을 지은 것이니 굳이 책할 것도 없지만 그것을 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은 역사를 쓰는 자의 죄이다. 후세에 역사를 쓰는 자는 전사(前史)에 전해지는 것이라 하여 구차히 그 누를 인습할 필요없이 일체 삭제해 버려야 할 것이다.
중국 역사의 동이전(東夷傳)에 실린 사실이 또한 〈위에 말한 속설과〉 서로 같은 것이 많으니, 대개 중국 사람들이 외이(外夷)의 일을 기록한 것이, 속설에 따라 기록한 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우리 나라 사람의 황당하고 괴이한 것을 근본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옛날에 환인 제석(桓因帝釋)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있었다. 환인 제석이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하므로,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내려 보내 인간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으니, 이분이 곧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그는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ㆍ수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을 맡아보게 하여 인간의 3백 60가지 일을 주관하고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한 굴에서 살며 늘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는데, 한번은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모숨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백일 동안 일광(日光)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 먹었는데 범은 이를 능히 참아내지 못하였으나 곰은 37일을 참아서 여자의 몸이 되었다. 여자가 된 곰은 그와 혼인해 줄 상대가 없어 늘 단수(檀樹) 밑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깐 변하여 그와 혼인해 주었으므로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같다.
상고하건대 이 말은 너무 허황하여 변증할 수 없으니, 《통감(通鑑)》에서 생략한 것이 옳다. 무릇 단군이란 우리 나라의 맨 처음 임금으로서 그 사람은 필시 신성한 덕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았을 것이다. 물론 옛날 신성의 탄생이 실로 여느 사람과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찌 그처럼 무리(無理)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대개 《삼국유사(三國遺事)》란 고려의 중[僧 일연(一然)을 가리킨다]이 지은 것이요, 《고기(古記)》 또한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이속(俚俗)의 호칭에서 나와 고려 때 이루어졌으니, 역시 중의 편집일 것이다. 그러므로 허황한 말을 부질없이 많이 하여 그 인명ㆍ지명이 불경(佛經)에서 많이 나왔다. 여기에 이른 환인 제석 역시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는가 하면, 기타 이른바 아란불(阿蘭佛)ㆍ가섭원(迦葉原)ㆍ다바라국(多婆羅國)ㆍ아유타국(阿踰陁國)의 따위가 모두 중의 말이다. 신라ㆍ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존숭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렀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 그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음을 민망히 여겨 심지어는 이같은 것을 정사에 엮어, 한 구역 어진 나라를 모두 괴이한 무리로 만들었으니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되어 있다.
단군(檀君)이 비서갑 하백(非西岬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부루(夫婁)인데, 우(禹) 임금이 도산(塗山)에서 회합을 가질 적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뒤에 복부여왕(北扶餘王)이 되었는데, 늙어 아들이 없으므로 하루는 대를 이을 아들을 빌고서 곤연(鯤淵)에 이르렀다가 소아(小兒)를 얻어 길렀으니 그것이 금와(金蛙)이다. 금와가 아들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는데,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멸망되었다.
○ 유씨(柳氏)는 이렇게 적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섰다 하나 그 이름이 유야무야하게 겨우 두 글자(단군(檀君))가 전해질 뿐인데, 후인들이 무엇을 근거하여 그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음을 알 것인가? 단군으로부터 삼국(三國)ㆍ여조(麗祖 고려 태조를 가리킨다)에 이르기까지 흥기한 많은 왕자(王者)가 알[卵]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반드시 금독(金櫝)에서 나왔고, 그 왕비도 하백(河伯)의 딸이 아니면 반드시 용녀(龍女)라고 하니 그 거짓을 조작하는 술책 또한 매우 졸렬하다.
상고하건대 단군의 향수(享壽)는 그 왕조가 역년한 햇수라고 이른 선유(先儒)의 말이 근사하다. 여기서 말한 부루가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면 이는 서한(西漢)의 말기에 해당되어, 향수 또한 거의 2천여 세가 되니 반드시 이런 이치가 없을 것이다. 고이(考異)에 자세히 보인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부여왕(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山川)에 제사하여 후사를 구하려 하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해부루(解夫婁))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 들추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애가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다.’ 하고 거두어 기르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ㆍ《동국통감(東國通鑑)》 및 여러 사책(史冊)이 다 이와 같다.
상고하건대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너무 요망스러운 말이다. 중국 사람들이 어찌 일찍이 계(啓)가 돌에서 나고 이윤(伊尹)이 공상(空桑)에서 났다는 말을 정사(正史)에 넣어 엮었던가? 이는 김씨(金氏 부식(富軾))가 취하여 역사에 전한 것인데, 후인들이 그 잘못을 답습하여 고대의 일은 혹 이런 것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니, 또한 가소롭고 민망스러운 일이다. 뒤에 이와 같은 예가 많다.
○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한 선제(漢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B.C. 57) 4월 병진에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 주변의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곧 그곳에 가보니 말은 간데 없고 큰 알[卵] 하나만 있었다. 그 알을 깨보니 어린아이가 있었으므로 소벌공은 곧 그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진인(辰人)은 호(瓠)를 박(朴)이라 하였는데, 처음 큰 알이 박과 같다 하여 박을 성(姓)으로 삼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ㆍ《사략(史略)》ㆍ《동사찬요(東史纂要)》가 모두 같은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 말이 더욱 괴이하다.
상고하건대 권씨(權氏 근(近))의 말이 이치에 가까우므로 그것을 정문(正文)에 취하였다.
○ 임씨(林氏 상덕(象德))는 이렇게 적었다.
현조(玄鳥)와 거적(巨跡)도 음양(陰陽)의 신령한 감응에 불과하여 그 잉태(孕胎)와 산육(産育)이 사람과 다르지 않다. 후세의 유온(劉媼)의 용감(龍感) 같은 것은 비록 이상한 일이긴 하나 그리 괴이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치가 있다. 그 어찌 알에서 나오고 말이 울었다는 혁거세(赫居世)의 사실처럼 턱없이 괴이하겠는가. 하물며 당시 해모수(解慕漱)ㆍ금와(金蛙)ㆍ주몽(朱蒙)ㆍ송양(松讓)이 모두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하고, 알영(閼英)ㆍ탈해(脫解)ㆍ수로(首露)가 모두 부모 없이 탄생하였다 하니, 어찌 이처럼 구석진 조그마한 나라에 요란스럽게도 천신(天神)의 자손이 많단 말인가. 또 더구나 혁거세의 어머니는 제실(帝室)의 딸로서 남편없이 잉태하여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배를 타고 진한(辰韓)에 이르러 혁거세를 낳고 드디어 신(神)이 되었다고도 한다.
주몽의 사실은 《진서(晋書)》에 고구려(高句麗)가 자칭 고신씨(高辛氏)의 후예라 하여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 했고, 김알지(金閼智)의 사실은 무열왕비(武烈王碑)에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로 세계(世系)를 삼는다.’ 하여 종잡을 수 없이 부적실한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잘못을 답습하고 그릇된 일을 전할 것인가. 의심되는 것은 전하여도 되지만, 그릇된 사실은 전하지 말아야 한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다.
부식(富軾)이 정화(政和 송(宋) 휘종(徽宗)의 연호) 연간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송(宋) 나라에 갔을 때 학사(學士) 왕보(王黼)가 여선(女僊)의 상(像)을 가리키며,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남편이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받게 되자 배를 타고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海東)의 첫임금이 되고 제녀(帝女)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僊桃山)에 장생하고 있으니 이것이 그 상이다.”
하고, 송(宋) 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하는 글에 어린애를 낳아서 나라를 창조하게 하였다는 구절이 있으니, 곧 동신(東神)은 선도산 신성(神聖)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또 “혁거세는 서술성모(西述聖母)의 소생이다.” 하였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선도산(僊桃山)의 본명이 서연(西鳶)인데 서술(西述)이라고도 하며 경주부(慶州府)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 여기에 의하면 신라 시조 또한 선도 여선(僊桃女僊)의 소생인데, 이상의 말과 또 서로 어긋나니 가소로운 일이다.
○ 《삼국사기》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다.
신라 시조 5년 춘정월(春正月)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그의 오른쪽 옆구리로 한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한 노구가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기르면서 그 우물 이름으로 계집아이 이름을 지었다. 그 계집아이가 자라 덕기가 있으므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여러 사책에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고하건대 용녀(龍女)의 설 역시 민중을 미혹하게 한 것이거나, 아니면 후인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리라.
○ 《삼국사기》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다.
석탈해(昔脫解)는 다바나국(多婆那國) 출생이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나라 국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는데, 아이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은 이를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그 알을 버리게 하였는데 그 아내는 차마 그러지 못하여 비단으로 그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버렸다. 그것이 금관국(金官國)에 이르니 금관국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고,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이때는 시조(始祖) 39년이다. 해변에 있던 한 노모(老母)가 이를 끌어내어 열어보니 거기에 한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 노모는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으나 성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데려올 때 까치[鵲]가 날아와 짖었다 하여 그 작(鵲)자의 한 변을 생략하여 석(昔)을 성씨로 삼고, 그 아이가 궤짝을 열고 나왔다 하여 탈해(脫解)로 이름을 지었다. 노모가 그 아이에게 이르기를,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요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학문을 하여 공명을 세우라.”
하니, 탈해는 이에 학문에 전력하고 겸하여 지리(地理)를 탐구하였다. 그는 곧 양산(楊山) 밑에 있는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그 터가 길지(吉地)라 하여 속임수를 써서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
《통감(通鑑)》에도 같다.
【안】속임수를 써서 빼앗은 것에 대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탈해가 토함산(吐含山)에 올라 살 만한 길지를 바라보고 찾아가 보니 곧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탈해는 남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이튿날 아침 그 집에 가 말하기를 ‘이 집은 우리 조상 때 집이다.’ 하고 곧 관가에 가 송사하게 되었는데, 관가에서 무엇으로 징험하느냐고 물으니, 탈해가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나간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조사해 봅시다.’ 하여 그의 말대로 조사해 본 결과 땅속에서 숫돌과 숯이 나와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
상고하건대 탈해가 해외(海外)에서 알[卵]로 떠내려와 사람으로 화하였다면 그 국명과 사정을 어떻게 알 것이며, 알았다면 어찌하여 그 성씨를 몰랐겠는가? 집을 송사하였다는 말은 더욱 하나의 웃음거리이다. 호공(瓠公)이 당시 재보(宰輔)였는데 어떻게 송사로 그를 이길 수 있었겠는가? 수로(首露)가 일어난 것은 유리왕(儒理王) 19년인데 《삼국유사》에는,
“탈해가 수로와 기술을 다툴 적에 매[鷹]도 되고 독수리[鷲]로 되며 참새[雀]도 되고 새매[鸇]도 되었다 하였다.”
하니, 그 말이 더욱 허황하여 이를 것도 없거니와, 구성한 괴설(怪說)도 스스로 모순을 나타내니 이는 곧 어린 아이들이 하는 미장(迷藏)의 희롱에 불과하다.
대개 《고기(古記)》의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 김씨(金氏)가 이를 취하였더라도, 《통감》에서 이를 산삭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안】《삼국유사》 및 《고기》의 말이 더욱 괴이하기 때문에 많이 생략하였다.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한 광무(漢光武) 건무 18년 임인(42)에 가락(駕洛)의 구간(九干)이 모여 계제사(禊祭祀 물가에서 요귀(妖鬼)를 쫓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데, 마침 귀봉(龜峰)에 이상한 기운이 있고 또 공중에서 무슨 말이 들리면서 곧 금합(金榼)을 얻게 되었다. 그 금합을 열어보니 6개의 금란(金卵)이 있었는데 하루도 못되어 모두 남자 아이로 변하였다. 그 아이들의 기상이 모두 늠름하고 장대하므로 뭇사람들은 경탄하여 기이하게 여기면서 처음 탄생한 아이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금란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金氏)로 성씨를 삼고,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국호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오가야(五伽倻)의 임금이 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삼국유사》 중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나온 것으로서 《통감》에서 인용하였고, 오씨(吳氏)가 지은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같다. 또 《여지승람》에,
“최치원이 지은 중[僧] 이정전(利貞傳)에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政見母主)가 곧 천신(天神) 이비하(夷毘訶)에게 정감(情感)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인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冠國王)인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으니, 뇌질주일은 곧 대가야(大伽倻)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별칭이요,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하였으나 가락국고기(駕洛國古記)에 말한 육란(六卵)의 설과 함께 허황하여 믿을 수가 없다.”
하고, 또,
“중 순응전(順應傳)에는 ‘대가야국(大伽倻國) 월광 태자(月光太子)는 곧 정견(政見)의 10세손이니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이다. 이뇌왕이 신라(新羅)에 구혼(求婚)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으니, 이뇌왕은 곧 뇌질주일의 8세손이다.’ 하였으나 상고할 수 없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 등이 《여람》ㆍ《통감》 등의 책을 편찬할 적에 이와 같은 말이 허황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줄 알면서 역사에 기록하였으며, 《동사찬요》는 절목만 뽑아 만든 사책인데도 이를 삭제하지 않았으니 또한 재택(裁擇)하지 않았다 하겠다. 고기(古記)라 하여 삭제하거나 고치기 어렵고 믿지 않을 수 없다면, 최치원의 말이 또한 저와 같이 같지 않으니, 어떻게 고기라 하여 믿을 수 있겠는가? 당시 무식하게 씌어진 전기(傳記)에 이와 같은 것이 허다하다. 비록 치원(致遠)의 문장이라 할지라도 불(佛)에 아첨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다 함께 요망한 지경으로 돌아가니 너무도 한심한 일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탈해왕(脫解王) 9년 어느날 밤 왕이 금성(金城) 서편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호공(瓠公)을 보내 가보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금빛의 조그마한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왕에게 사실을 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그 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그 속에는 조그마한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은 곧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서, 그 아이가 금빛 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라 하고 시림(始林)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하여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았다. 《통감(通鑑)》 및 모든 사책이 다 같다.
○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논하기를,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氏)는 다 알[卵]에 나오고, 김씨(金氏)는 하늘로부터 금궤(金櫃)에 들어 탄생하였다 하며, 혹은 금거(金車)를 탔다고도 하나 이는 더욱 허황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 서로 전해져서 실사(實事)라고 이른다.”
하였고, 또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논하기를,
“신라고사(新羅古事)에 ‘하늘이 금궤(金櫃)를 내렸기 때문에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하니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전승(傳承)되었기 때문에 그 말을 산삭해 버릴 수 없다. 그런데 또 듣건대 신라 사람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고 한다.”
하였고, 또 김유신전(金庾信傳)에,
“유신(庾信)의 12세조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하였으며, 신라의 국자 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찬한 김유신비(金庾信碑)에도 소호(少昊)의 후예라 하였으니, 수로는 신라와 동성(同姓)이다.
상고하건대 이는 김수로(金首露)의 사실과 동일한 괴설인데, 유신의 말로 본다면 금란(金卵)과 금독(金櫝)의 허망한 말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스스로 깨치게 되는 것이다.
【안】 파사왕 비(婆娑王妃) 사성 부인(史省夫人)이 김씨(金氏)였으니, 신라 때 벌써 김씨가 있었다.
○ 내가 스승(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가리킨다)에게 들은 것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북연(北燕)의 고운(高雲)은 본래 고려(高麗)의 지속으로써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예이다.’ 하였는데, 무릇 동명왕(東明王)의 아버지 해모수(解慕漱)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고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하였다. 저 고운도 과연 지속이었다면 또 어찌하여 고양씨의 후예라고 하였겠는가? 신라의 알지(閼智)가 자칭 금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한 것과 같이 수로(首露) 역시 소호(少昊)의 후예라고 하였을 것이다. 금독(金櫝)ㆍ금란(金卵)의 말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생각건대 고(高)ㆍ김(金) 두 성씨는 처음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옮겨온 듯한데, 저 괴이한 말들은 곧 민간에서 와전(訛傳)된 것이 아니겠는가? 상고 시대(上古時代)에 인물이 처음 생겨날 때에는 필시 기화(氣化)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점점 번식하여 형화(形化)된 이후에는 다시 이런 이치가 없었다.
삼국(三國)이 일어난 것은 서한(西漢) 말기이니, 단기(檀箕) 때부터 이때까지는 전해온 세대가 오래되었다. 삼한이 솥발처럼 있어서 이리저리 서로 변해졌는데, 어찌하여 그 세대에 기화로 생겨났다는 인물이 그토록 많은 것인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그 먼 조상의 신성(神聖)에 대해 도무지 믿지 않거니와, 국사(國史)에 전하는 허황한 말도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고 본다. 대개 백제(百濟)의 역사가 가장 먼저 나왔으나 개국(開國)한 지 4백 년이 넘은 뒤에 있었던 일이니, 그 입으로 전한 말을 적은 것에 어찌 의거할 만한 참다운 사실이 있었으랴!
지금 비록 온갖 서적이 고루 다 갖춰진 뒤라 할지라도 만약 수백 년 전의 일을 기록한다면, 민간에서 아무렇게나 전하는 말과 외람되이 허황한 말을 적은 것에는 그 잘못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삼국이 처음으로 일어날 즈음에 있어서랴! 붓을 잡은 자로서는 마땅히 취사(取捨)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한 건무(漢建武) 24년 7월에 허 왕후(許王后)가 아유타국(阿踰陀國)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왔다. 수로왕(首露王)은 이때 유천간(留天干)에게는 망산도(望山島)에서,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재(乘岾)에서 각각 망을 보도록 명하였다. 마침 붉은 비단 돛과 꼭두서니 빛의 깃발이 바다 서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이자 신귀간이 달려와 아뢰었다. 왕은 궁궐 서쪽에다 장막을 치고 기다렸는데, 왕후는 배를 매고 육지에 올라 높은 봉우리에서 쉬며 입었던 비단 치마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예물로 바치고 곧 장막에 이르렀다. 왕은 이를 맞아들이고 이틀 뒤에는 같은 연(輦)을 타고 대궐에 돌아와서 왕후로 삼았다.”
하고, 또,
“왕후는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왕녀(王女)라 하는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보주 태후(普州太后)라 부른다.”
하였다. 이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를 근본한 것인데,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 대략 이를 인용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 허황하여 변증할 수 없다.
○ 《동국통감(東國通鑑)》 신라(新羅)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 조에 이렇게 되어 있다.
처음 동해가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迎烏)요 아내는 세오(細烏)라 하였다. 하루는 영오가 바닷가에서 마름을 캐다가 표류하여 일본국(日本國)의 조그마한 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세오가 그 남편을 찾아 또 바다에 표류하여 그 나라에 이르러 왕비가 되었는데, 당시 영오와 세오가 일월(日月)의 정기라 하여 곧 영일현(迎日縣)을 설치하였다. 이는 《삼국유사》를 근본한 말인데, 《동사찬요》에도 이와 같다.
○ 《고려사(高麗史)》 지지(地志)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임정(臨汀)을 고쳐 영일(迎日)이라 했다 하였으니, 영일은 신라 때에 시작된 명칭이 아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고을이 아침 해가 뜨는 양곡(陽谷)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영일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속담에 전하는 영오(迎烏)의 일이 어찌 그처럼 터무니없을 수 있으랴? 신라 사람들이 괴이함을 좋아하는 유가 이러하니 고증할 수 없다.”
하였으니, 그 말이 타당하다. 《동국통감》 및 《동사찬요》도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그 사실을 취하였을까.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
“신라 사람 일라(日羅)가 왜국(倭國)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죽어 애탕산신(愛宕山神)이 되었는데, 왜인들은 그를 높이 받든다.”
하였는데, 지금 혹자는 이를 영오의 일이라 하나, 이를 분명한 사실이라고 부회하여 근거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행하였는데,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살피시오.”
하였다.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는데, 기사가 남쪽의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까마귀의 간 곳을 잃어버렸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리니 그 겉봉에 씌어 있기를,
“이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이에 대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하였다. 왕이 떼어 보니 그 글에, 금갑(琴匣)을 쏘라고 씌어 있으므로 왕이 곧 궁에 들어가 금갑을 보고 쏘니, 거기에는 곧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곧 사형을 당하였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은 만약 까마귀[烏]ㆍ쥐[鼠]ㆍ용(龍)ㆍ말(馬)ㆍ돼지[猪]의 공로가 아니었다면 왕이 죽었을 것이라 하고, 드디어 정월의 상자(上子 그달의 첫째 자일(子日))ㆍ상진(上辰)ㆍ상오(上午)ㆍ상해(上亥) 등 날짜에는 백사를 삼가고 감히 동작(動作)하지 않으면서 신일(愼日)이라 한다. 15일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하늘에 제사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못을 서출지(書出池)라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것도 섞어 인용하였다.
상고하건대 용(龍)은 노인을 가리킴이요, 말은 기사가 탄 것을 말함이니 이 말이 더욱 허황하다. 본사(本史)에는 보이지 않고, 《동국통감》 및 《동사찬요》는 모두 《삼국유사》를 근본하였으되 그 글이 다르니, 다시 무엇을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이 해마다 이날이 되면 찰밥으로 까마귀에 제사하고, 또 용은 비를 주고 말은 부지런히 수고하여 사람에게 공로가 있으며, 돼지와 쥐는 곡식을 소모하므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 하여, 해마다 연초의 진일(辰日)ㆍ오일(午日)ㆍ해일(亥日)ㆍ자일(子日)이 되면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며, 백사를 금하고 서로 어울려 즐겁게 놀면서 신일(愼日)이라 이르니, 이는 모두 괴이한 말을 취합한 것으로서 말이 되지 않는 사실이라 모두 취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왕(扶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재상 아란불(阿蘭佛)이,
“일전 어느날 밤 꿈에 천제(天帝)께서 ‘장차 나의 자손이 이곳에 건국(建國)하려 하니 너희들은 다른 곳으로 피하라.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토양(土壤)이 기름져 오곡(五穀)이 잘 되는 땅이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다.”
하고, 아란불은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안】 아란(阿蘭)ㆍ가섭(迦葉)은 모두 불가의 말이다. 이때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동북쪽 황원(荒遠)한 지역에 어떻게 먼저 이와 같은 칭호가 있었겠는가? 이는 나려(羅麗) 당시 중들이 전한 것인데, 사가(史家)에서 이를 인용하면서 변별하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 구도(舊都)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며 와서 도읍하였다.
권남(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에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천제(天帝)가 태자(太子)인 해모수를 보내어 부여(扶餘)의 고도(古都)에 하강하게 하였는데, 그는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따르는 사람은 1백여 명으로 흰따오기[白鵠]를 탔다. 채색 구름이 그 위에 떠 있고 음악 소리가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오더니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러 10일을 지난 뒤에 비로소 하강하였다. 머리에 조우관(鳥羽冠 새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검(龍光劒)을 찼는데,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에서 이를 천왕(天王)이라 하였다. 이때는 곧 한(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4월 8일이다.”
하였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것 역시 같되 더욱 모순되어 믿기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고도(古都)는 곧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니 대요(大遼) 의주(醫州)에 있다.”
하였다.
해부루가 훙하매 금와(金蛙)가 그 왕위를 이었는데, 이때 금와는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백두산(白頭山)으로 추측된다.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얻고 그 여자의 내력을 물으니, 그 여자가,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라 한다.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지금 호지(胡地)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 압록강(鴨綠江) 가에 있는 집속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운 뒤 곧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에게 몸을 허락하였다 하여 드디어 우발수에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
하므로, 금와는 이를 괴상히 여겨 집안이 깊이 가두었는데 일광(日光)이 그에게 비치었다. 몸을 피하니 일광이 또 그를 따라 비치었다. 그리하여 곧 태기가 있더니 닷되들이만한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은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다 버리니 우마가 밟지 않고 피해 갔다. 다시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그 알을 덮어주었다. 왕이 그 알을 깨려 하였으나 깨지지 않아 그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다. 그 어머니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아이의 외모가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유독 여느 아이와 달리 제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응제시주(應製詩註)》에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이렇게 적었다.
북부여(北扶餘) 성 북쪽에 있는 청하 하백(靑河河伯)이 세 딸을 두었으니, 첫째는 유화(柳花), 둘째는 훤화(萱花)요, 셋째는 위화(葦花)로 그 신기로운 자태가 요염하였다. 그들은 웅심연(熊心淵) 가에서 놀다가 왕을 보고 곧 물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채찍으로 땅에 금을 그어 집을 만든 다음 자리를 펴고 술을 베풀었다. 세 딸이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하자 왕은 유화를 못가게 가로막았다. 하백이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너는 어떤 사람인데 나의 딸을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는가?”
하니, 왕이,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혼인하고자 한다.”
하였다. 하백이 또,
“네가 구혼(求婚)을 하되 어찌하여 중매로 하지 않는가?”
하니, 왕이 부끄러워하여 하백에게 가보려 하였으나 갈 수가 없어 유화를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 딸은 왕에게 정이 들어 가려 하지 않으면서 곧,
“용거(龍車)가 있으면 하백에게 갈 수 있다.”
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하늘에 고(告)하자 오룡거(五龍車)가 공중으로부터 내려 왔으므로 왕은 하백의 딸과 함께 그 수레를 탔는데, 홀연 풍운(風雲)이 일어나서 그 궁(宮)에 이르게 되었다. 하백이 예절을 갖추어 맞아들이며 앉아 이르기를,
“혼인이란 천하의 중대한 일인데 어찌 이처럼 실례하여 우리 문종(門宗)을 욕되게 하는가? 왕이 천제의 아들일진대 무슨 신술(神術)이 있는가?”
하니, 왕은 곧 시험해 보자고 하였다. 이리하여 하백은 잉어[鯉]ㆍ사슴[鹿]ㆍ꿩[雉]으로 화신하고, 왕은 수달피[獺]ㆍ시랑[豺]ㆍ매[鷹]로 화신하여 서로 잡으려 하니, 하백이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 관생(館甥)으로 성례(成禮)하고,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염려되어 주악(酒樂)을 베풀어 왕에게 권하여 7일 만에 깨어나게 하였다. 술이 만취되었을 때 소혁여(小革輿)에 함께 싣고 용거(龍車)를 메워 하늘에 오르게 하려 하였는데, 물속에서 나오기 전에 왕이 곧 술에서 깨어나 하백녀(河伯女)의 황금차(黃金釵)를 취하여 혁여(革輿)를 뚫고 그 구멍으로 나와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하백이 그 딸을 꾸짖기를,
“네가 내 훈계를 따르지 않다가 끝내 우리 가문을 욕보였다.”
하며 딸의 입술을 뽑아 그 입술의 길이가 3척(尺)이나 되었다. 하백은 곧 그 딸을 우발수(優渤水)로 귀양보냈는데, 어사(漁師)가 금와(金蛙)에게,
“요즈음 통발에 든 고기를 도둑질하는 짐승이 있는데 무슨 짐승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왕(금와)이 그물로 잡게 하였다. 그물이 찢어지므로 다시 철망(鐵網)을 만들어 비로소 한 여자를 얻게 되었는데, 입술이 길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 입술을 세 차례나 잘라낸 뒤에 말하므로 왕은 곧 천제자(天帝子)의 비(妃)인 줄 알게 되었다. 왕이 이를 으슥한 방에 가두자, 햇빛이 비치므로 몸을 피하니 그 햇빛이 몸을 따라 비치었다. 그러자 임신되어 신작(神爵) 4년 계해 4월에 주몽(朱蒙)을 낳으니, 그 울음 소리가 매우 웅장하고 골격 또한 빼어났다. 처음 탄생할 때 왼쪽 겨드랑이로부터 닷되들이만한 큰 알 하나를 낳으니, 왕은 괴이한 일이라 하여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아니하고, 길바닥에 버리니 우마(牛馬)가 피해갔다. 또 다시 들에다 버렸는데 새가 날개로 덮어 길러주고 구름이 끼어 흐린 날씨라도 그 알 위에는 광채가 비쳤다. 왕이 쪼개려 하였으나 깨지지 않아 그 알을 다시 그 어머니에게 보내 따스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알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한 달이 채 못되어 제법 말할 줄 알아 그 어머니에게,
“파리가 눈을 빨아 잠을 잘 수 없으니 나에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 달라.”
하므로, 그 어머니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그것으로 물레 위에 앉은 파리떼를 맞혔다. 부여(扶餘) 풍속에 활 잘 쏘는 것을 일러 주몽이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지었다.
금와(金蛙)는 아들 일곱을 두었다…… 정문(正文)에 보인다. 주몽이 엄호수(淹淲水)에 이르러 건너려 하는데 다리가 없었다…… 정문에 보인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렀다……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한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주몽이 차차 자라매 금와의 일곱 아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하였다. 왕자는 종자(從者) 수십 명과 사냥하여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많이 잡았다. 왕자는 곧 주몽을 나무에 결박해 놓고 사슴을 빼앗으니 주몽은 나무를 뽑고 갔다. 태자 대소(帶素)가 왕에게 아뢰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요 또 신기로운 용맹이 있으니, 만약 일찍 처치하지 아니하면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그로 하여금 말[馬]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원망하며 어머니에게,
“내가 천제의 아들로서 남의 말이나 먹이고 있으니 죽느니만 못합니다. 남쪽 지방에 가 나라를 창건하고자 하나 어머니가 있어 감히 못합니다.”
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는 나 역시 부심(腐心)하는 바이다. 내 들으니 사람이 먼 길을 발섭하려면 모름지기 준마(駿馬)가 필요하다 하였다.”
하고, 그 어머니는 곧 마판에 가 긴 채찍으로 말을 난타하였다. 모든 말이 모두 놀래어 달아나는데 붉은 말 하나가 두 길이나 넘는 난간을 뛰어 넘었다. 주몽은 그 말이 준마임을 알고 남몰래 말의 혀에 바늘을 박아 놓으니, 그 말이 먹지 못하여 볼품없이 파리해졌다. 왕이 마구를 살펴보고 뭇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그 파리한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곧 혀에 박았던 바늘을 뽑아내고 전보다 더 잘 먹였다. 뒤에 사냥할 적에도 주몽이 잘 쏘았다…… 개사수(盖斯水)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니 배가 없었다. 주몽은 뒤쫓아오는 군사들의 추격이 두려워 채찍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이요 하백의 외손으로서 도망하여 이에 이르렀는데, 추격하는 자가 뒤쫓고 있으니 어찌합니까?”
하며,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 떼가 물위에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그를 타고 무사히 건너자 고기와 자라 떼가 곧 흩어져 뒤쫓던 기병이 물을 건너지 못하였다. 처음 주몽이 어머니와 차마 작별하지 못하니, 그 어머니가 염려하지 말라 하면서 곧 오곡(五糓)의 종자를 싸서 주었다. 주몽은 그 보리씨[麥種]를 잃어버리고 와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두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와 앉았다. 주몽은 이것이 어머니가 보리씨를 보낸 것이리라 하고 활로 쏘아 단발에 두 마리 다 얻었다. 그 비둘기의 목구멍을 열어 과연 보리씨를 얻어내고,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곧 소생하였다. 주몽이 도중에 세 사람을 만났다…… 비류(沸流)에 정착하여 거기에서 살았다.
또…… 주몽은 비류수(沸流水) 속에 채엽(菜葉)이 떠내려옴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사냥을 하면서 비류국(沸流國)을 찾아가니, 그 나라 국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
“과인이 해우(海隅)에 외따로 있어 군자(君子)를 만나 보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우연히 만나게 되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니, 주몽의 대답이,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모처(某處)에 와서 도읍하였다.”
하였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기서 여러 대를 왕 노릇 하였다……”
하면서도 송양이 항거하지 못하였다.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주몽이 처음 졸본(卒本)에 이르러 비류수 속에 채엽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사냥하면서 찾아가니 과연 비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국왕 송양은 비범한 주몽의 용모를 보고,
“과인이 유벽한 해외(海外)에 있어 군자를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니,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서국(西國)의 왕이오. 감히 묻노니 군왕께서는 누구의 후예인가?”
하였다. 왕이,
“나는 선인(僊人)의 후예로 여러 대를 왕 노릇하였으나, 이곳은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렵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얼마 안 되니 우리의 부용(附庸)이 되는 것이 어떠하냐?”
하니, 주몽은 이 말에 분노하여 이르기를,
“과인은 천제의 후예이다. 지금 왕은 신선의 후예가 아니면서 참람하게 왕이라 호칭하니, 만약 나에게 귀부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하였다. 왕은 주몽이 늘 천제의 후손이라 일컬으므로 마음속으로 의심을 품고 있다가 그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하며 이르기를,
“그대와 활쏘기를 겨루고자 한다.”
하고 그는 그린 사슴을 1백 보(步) 안에 놓고 쏘았는데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고, 주몽은 옥지환(玉指環)을 1백 보 밖에 걸어 놓고 쏘았는데 기왓장처럼 부서졌다. 그리하여 왕이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주몽의 국업(國業)은 새로 조성되었으나 의식이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 왕의 예도에 결함이었다. 종신(從臣) 부분노(扶芬奴)가 나와 아뢰기를,
“대왕이 부여(扶餘)에서 곤욕을 당하다가 만번이나 죽을 힘을 내어 요좌(遼左)에 와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이는 천명이라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며, 세 사람과 함께 비류국에 가 기물을 가져오니, 왕이 사람을 보내 사실을 고하였다. 주몽이 이를 두려워하여 몰래 각색(角色)을 두드리자 왕이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또 왕은 도읍을 세움의 선후 차례로 부용을 삼고자 하였는데, 주몽이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집을 짓고 있으므로 송양이 이를 와 보고 또한 다투지 않았다. 주몽이 서쪽을 순행하다가 흰 사슴 한 마리를 얻어 그 사슴을 해원(蠏原)에다 거꾸로 매달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 비류국의 왕도를 쓸어버리지 아니하면 내 진실로 너를 풀어주지 않으리라.”
하니, 그 사슴의 슬픈 울음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7일 동안 장마가 져서 송양의 도읍을 쓸어버렸다. 왕은 위삭(葦索)을 물에 건너지르고 압마(鴨馬)를 타니 백성들은 모두 그 위삭을 잡았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었는데,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동명왕(東明王) 3년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鶻嶺)에 일어나 사람들은 그 산을 볼 수 없었고, 오직 수천 명의 사람 소리만 들리며 토공(土功)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주몽이,
“나를 위해 성을 쌓는다.”
하였다. 7일 만에 운무(雲霧)가 걷히자 성곽과 궁궐이 이루어졌다. 주몽은 곧 하늘에 배례를 올리고 그 궁궐로 나아갔다.
○ 《삼국사기》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유리(類利)를 낳았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갈 때에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아들을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되 내가 유물(遺物)을 칠릉석(七稜石 일곱 모가 진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그것을 찾는 자가 내 아들이다.’ 하였다.”
하니, 유리가 이 말을 듣고 산곡(山谷)에 가서 그것을 찾다가 못찾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하루는 그가 마루 위에 있을 때 무슨 소리가 주춧돌 틈바구니에서 나는 것 같았다. 가서 살펴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곧 기둥 밑을 찾아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었다. 드디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ㆍ구추(句鄒)ㆍ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卒本)에 가서 부왕(父王 주몽)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내어 맞추어 보니 완전한 칼 한 자루가 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ㆍ《찬요(纂要)》ㆍ《고기(古記)》에도 다 같다.
《고기》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다.
유리가 부러진 칼을 바치니 왕이 가지고 있던 칼을 내어 맞춰 보는데, 피가 흐르며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말하기를,
“네가 진실로 내 아들일진대 무슨 신술이 있느냐?”
하니, 유리가 공중으로 몸을 솟구치면서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타고 올라가니, 왕이 그 신술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상고하건대 삼국 시대 신라와 고구려 두 시조의 일어난 사실이 모두 허황하되 고구려가 더욱 심하다. 이는 모두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이 지껄이는 우스갯소리 고담거리요 단정한 선비들이 칭도할 것이 못되거늘, 정사(正史)에서 이를 다 간정(刊正)하지 않았으니 너무나 통탄할 일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평양(平壤)에 동명왕(東明王)의 고적이 많으니, 구제궁(九梯宮)ㆍ기린굴(麒麟窟)ㆍ조천석(朝天石) 같은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동명왕의 묘가 평양부 남쪽 중화(中和) 지경인 용산(龍山)에 있으니 세속에 진주묘(眞珠墓)라 부른다.”
하였는데, 《여지승람》에서 그 말을 인용하여,
동명왕이 항상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일을 아뢰곤 하다가, 40세가 되자 드디어 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태자는 동명왕이 두고 간 옥편(玉鞭)을 용산(龍山)에 장례하였는데, 이첨(李詹)이 쓴 기린굴(麒麟窟) 시에,
아득한 지난 일이 괴상하고 신비하여 / 往事悠悠怪且神
성동에 있는 굴을 기린굴이라 하네 / 城東有窟號麒麟
전설이 담소의 근거가 될 만하니 / 流傳足可供談笑
과객이야 구태여 진위 따져 무엇하랴 / 過客何煩辨僞眞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 허실을 꼬집어 말하지 않고 모호하게 말하며 지났다면 세대가 멀어지면서 말이 더욱 실다워졌으리라. 하물며 당시 평양은 낙랑(樂浪)의 땅이었으니 동명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 낙랑의 고각(鼓角)이 스스로 울리다. 고이(考異) 조에 보인다.
○ 《고려사》 지리지에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와 첫째를 양을나(良乙那), 다음을 고을나(高乙那), 그 다음을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세 사람이 사냥을 하다가 자니(紫泥)로 봉한 목함(木函)이 동해(東海)가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가서 열어 보니, 목함 안에 석함(石函)이 들어 있었고 홍대 자의(紅帶紫衣) 차림의 사자(使者)가 따라왔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셋과 망아지ㆍ송아지 그리고 오곡(五糓)의 종자가 나왔다. 사자가,
“나는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입니다. 우리 나라 임금께서 이 세 딸을 낳으시고 말씀하기를 ‘서해중(西海中)의 악신(嶽神)이 신자(神子) 셋을 낳아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세 딸을 모시고 가게 하였습니다.”
하고, 곧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은 나이의 차례로 나누어 장가들었다.
상고하건대 이 역시 황당무계한 말이다. 탐라(耽羅)는 바다의 섬으로 그 태초에 인물이 기화(氣化)로 생겼다는 것은 그리 괴이하지 않으나, 이른바 석함이니 목함이니 일본 사자니 구름을 탔다느니 하는 말은 그처럼 무리할 수 없거니와, 당시 일본이란 국호가 없었으니 더욱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동국통감》ㆍ《찬요》 등 사책이 이를 취하여 실지로 만든 것은 무슨 까닭인가?
상고하건대 우리 나라 사람이 스스로 괴설을 지어낸 것인데, 중국사에서 전기(傳記)를 지을 때 대부분 그 풍속의 전하는 것을 따르고 다시 분별하지 않았으니, 《후한서(後漢書)》 부여전(扶餘傳)에 기록된 동명(東明)의 사실과 《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에 기록된 주몽(朱蒙)의 사실 같은 유가 바로 그것이다. 일찍이 《유양잡조(酉陽雜俎)》의 신라(新羅) 사람 방타(旁㐌)의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니 요즈음 어린 아이들도 할 수 있는 말이다. 대개 우리 나라 전설을 믿을 만하다고 지목하기 때문에 기이함을 좋아하는 중국 선비들이 이를 듣고 기록한 것이다. 우리 나라 풍속의 괴설이 대개 이러한 종류이니 자못 우스운 일이다.
《후한서(後漢書)》 부여전(扶餘傳)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처음 북이(北夷) 고리국(櫜離國)의 시아(侍兒)가 임신하고 말하기를,
“천상(天上)으로부터 무슨 기운이 계란처럼 크게 뭉쳐 내려옴을 보고 임신하였다.”
하므로, 왕이 그 시아를 가두었는데, 뒤에 드디어 한 사내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아니하고, 다시 마판에 옮기게 하였으나 말 역시 돼지와 같이 하였다. 왕이 신기하게 여겨 그 어미에게 데려다 기르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이름이 바로 동명(東明)이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아 왕이 그 용맹을 꺼려 죽이고자 하므로, 동명이 도망쳐 남쪽으로 엄호수(淹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어별(魚鱉)이 떼를 지어 물위로 떠올라 동명은 그를 타고 건넜고 이어 부여(扶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안】 고(櫜)는 고(高)와 음이 같으니, 고리(櫜離)는 아마 옛날에 고려국(高麗國)을 지칭한 말일 듯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리국을 영품리왕(寧禀離王)으로 썼으니, 이는 곧 부루(夫婁)의 별칭이다.
《북사(北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부여왕(扶餘王)이 일찍이 하백(河伯)의 딸을 얻어 실내에다 가두었는데, 햇빛이 비치므로 몸을 피하니 햇빛이 따라 비치었다. 뒤에 임신되어 닷되들이만한 큰알 하나를 낳으므로, 왕이 이를 버려 개에게 주니 개가 먹지 아니하고, 돼지에게 주니 돼지도 먹지 아니하며, 길바닥에 버리니 우마가 피해 갔으며, 들에 버리니 뭇새가 날아와 날개로 그 알을 덮어 주었다. 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여도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그 어머니에게 돌려보냈다. 그 어머니가 물건에 싸 따스한 곳에 두었는데 한 사내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자라매 자(字)를 주몽(朱蒙)이라 하였는데, 당시 풍속에 주몽이란 활 잘 쏘는 자를 이른다. 부여 사람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라 하여 제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치게 하였다. 주몽은 말을 치면서 남몰래 말의 좋고 나쁨을 시험하여, 준마는 먹이를 줄여 파리하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파리한 말은 주몽을 주었다. 뒤에 들에 나가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한 개를 주었는데, 주몽은 비록 화살 하나를 가졌으나 짐승은 매우 많이 잡았다. 그리하여 부여의 신하들이 또 죽이기를 꾀하였다. 그 어머니가 주몽에게 죽이고자 꾀하는 사실을 알리니, 주몽은 곧 언위(焉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도중에서 큰 강 하나를 만났다. 그 강을 건너려 하나 다리가 없었고 부여 사람은 매우 급히 추격하고 있었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인데 지금 추격하는 군사가 쫓아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 물을 건너겠습니까?”
하니, 곧 어별(魚鱉)이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주몽이 무사히 그 강을 건너게 되었다. 주몽이 건너자 어별이 흩어져 추격하던 기병이 그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도리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보았는데, 한 사람은 마의(麻衣)를 입었고, 한 사람은 납의(衲衣)를 입었고, 한 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가 거기에 살며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어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방타(旁㐌)는 신라 사람인데, 그 아우가 매우 부자로 살았다. 방타는 따로 살면서 의식을 구걸하니, 국중의 어느 사람이 그에게 빈 땅 일묘(一畝)를 주었다. 방타는 곧 그 아우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하니, 그 아우는 그 종자를 쪄서 주었으나 방타는 그 사실을 몰랐다. 뒤에 마치 소만한 누에 한 마리가 나와 두어 나무의 뽕잎을 먹어도 부족하였다. 아우는 그를 알고 그 누에를 죽이니 사방 1백 리 주위에 있는 누에들이 그 집에 날아들어 잠왕(蠶王)이라 일컬었다. 사방의 이웃이 같이 실을 켜 길쌈을 하되 값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곡식은 오직 한 알이 붙은 이삭이 그 길이가 한 자가 넘었다. 방타는 항상 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곡식을 물어갔다. 방타는 그 새를 쫓아 산으로 들어가니 새는 돌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타는 하는 수 없이 그 돌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밤이 되어 달이 밝았는데, 여러 아이가 붉은 옷을 입고 같이 노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한 아이가,
“네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니, 그 아이의 대답이,
“술[酒]을 원한다.”
하였다. 그 아이가 하나의 금방망이[金椎]를 내어 돌을 치니 술과 술통이 나와 갖추어지고, 또 한 아이가 음식을 원한다는 말에 또 그 방망이를 치니, 떡ㆍ국ㆍ적(炙) 등의 각색 음식이 돌 위에 나열되었다. 그를 먹으면서 한참 동안 놀다가 흩어지면서 그 금방망이를 돌틈에 꽂았다. 방타는 그 방망이를 가지고 돌아와 하고 싶은 대로 그 방망이를 두들겨 장만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부함이 나라와 겨루었으며, 항상 주기(珠璣)의 보물로 그 아우를 만족하게 해 주었다. 뒤에 그 아우가 형의 일을 본받으려 하다가 뭇아이들에게 잡혀 그 코가 코끼리 코처럼 뽑혀서 돌아왔다.
○ 《고려사(高麗史)》 세계(世系)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려의 선대는 사책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즉위(卽位) 2년에 왕의 3대 조고를 추증하여 시조(始祖)는 원덕 대왕(元德大王), 비(妣)는 정화 왕후(貞和王后), 의조(懿祖)는 경강 대왕(景康大王), 비(妣)는 원창 왕후(元昌王后), 세조(世祖)는 위무 대왕(威武大王), 비(妣)는 위숙 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
○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호경(虎景)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칭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하고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부소산(扶蘇山)에 이르러 장가를 들어 살고 있었다. 여기에 바위가 무너졌다는 기사가 있으나 기록하지 않는다. 뒤에 평나산신(平那山神)과 부부(夫婦)가 되어 함께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호경(虎景)이 구처(舊妻)를 잊지 못하여 밤마다 꿈처럼 와서 교합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강충(康忠)이다. 여기에 송악산(松嶽山)에 소나무를 심은 기사가 있으나 기록하지 않는다. 강충이 두 아들을 낳아 막내아들을 보육(寶育)이라 하였는데, 그는 일찍이 곡령(鵲嶺)에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오줌을 누었더니 삼한(三韓)의 산천이 은해(銀海)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그의 형 이제건(伊帝健)에게 말하였더니 이제건이,
“너는 큰 인물을 낳으리라.”
하고, 그의 딸 덕주(德周)를 아내로 삼아 주어 뒤에 두 딸을 낳았다. 막내딸을 진의(辰義)라 하는데 아름답고 재주가 많았다. 나이 겨우 15세 때 그의 언니가 오관산(五冠山)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오줌이 흘러 천하에 넘치는 꿈을 꾸었다. 깨어서 진의에게 이야기하였더니 진의는 비단 치마로 그 꿈을 사자고 하였다. 언니는 진의의 청을 허락하였다. 진의는 언니에게 다시 꿈 이야기를 하라 하고 이것을 잡는 시늉을 하며 세 번 품에 안으니 이윽고 몸이 무엇을 얻은 것처럼 움찍거리고 마음이 자못 든든해졌다. 마침 당 숙종(唐肅宗)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선종(宣宗)의 일로 만들었다. 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산천을 편력하다가 송악군(松嶽郡)에 이르러 보육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의 두 딸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터진 옷을 꿰매 달라고 청하니, 보육은 중화(中華)의 귀인임을 알아차리고 마음으로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여, 곧 장녀로 그 명에 응하게 하였더니 그녀는 문턱을 넘다가 코피를 흘리며 나오므로 진의를 대신으로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 그는 한달 동안 머물다가 그녀가 임신되었음을 알고 작별할 때 말하기를,
“나는 대당(大唐)의 귀존이다.”
하고, 궁시(弓矢)를 주며 이르기를,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
하였는데, 과연 아들을 낳아 작제건(作帝建)이라 하였다. 뒤에 보육을 추존하여 국조 원덕 대왕(國祖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를 정화 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작제건이 서해(西海)에 들어가 늙은 여우를 사살하고 용녀(龍女)에게 장가들었다는 사실은 번거로워 기록하지 않는다. 본사(本史)에 보인다. 작제건은 서해(西海) 용녀(龍女)에게 장가들었는데, 뒤에 추존하여 의조 경강 대왕(懿祖景康大王)이라 하고 용녀를 원창 왕후(元昌王后)라 하였다.
원창이 아들 넷을 낳았는데 장남을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뒤에 융(隆)으로 고쳤다. 자(字)를 문명(文明)이라 하였으니 이가 곧 세조(世祖)이다. 용모가 뛰어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기국과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三韓)을 병탄(倂呑)하려는 뜻을 품었었다. 그는 일찍이 꿈에 한 미인을 보고 배필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뒤에 송악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나니 그 용모가 꿈에 약속한 여인과 같으므로 드디어 혼인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온 곳을 알지 못하므로 세상에서는 그 이름을 몽부인(夢夫人)이라 하였으며, 혹은 그녀가 삼한(三韓)의 모(母)가 되었으므로 드디어 한씨(韓氏)라 하였다고 하는데, 이가 곧 위숙 왕후(威肅王后)이다. 민지의 《편년강목》에도 대략 서로 같으므로 번거로이 기록하지 않는다.
유씨(柳氏)는 이렇게 적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일은 족히 논할 것이 없으나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는 볼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허황함을 면치 못한다. 어찌 왕실(王室)을 추숭함에 대해 전설의 문란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고려조의 군신(君臣)이 무턱대고 조상을 위조하여 중국의 기롱을 받기까지 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 이유를 따진다면 대개 민도가 낮은 데다가 불(佛)에 아첨하는 습속이 있어 그런 것이다. 위의 가르침이 없으면 그 피해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혹은 왕씨(王氏) 원세(遠世)에 중국 귀인이 동방(東方)에 와 놀다가 이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을, 후인들이 그대로 숙종(肅宗)ㆍ선종(宣宗)에 기록한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진의(辰義)가 꿈을 산 것은 곧 신라(新羅) 태종왕(太宗王)의 비(妃)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에 대한 사실이요, 곡령(鵠嶺)에 올라 오줌을 누어 국중에 넘친 것은 곧 현종(顯宗)의 모(母)에 대한 사실인데, 후인들이 부회하여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정인지(鄭麟趾)는 《고려사(高麗史)》를 지으면서 이와 같은 말을 취하여 전기(傳記)를 만들지 않았으니,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비하여 조금은 취할 것이 있다.
유씨는 또 이렇게 적었다.
김부식(金富軾)은 세상에서 박아(博雅)한 선비라고 일컫는데, 이같이 역사를 썼으니 실로 한심한 일이다. 김관의(金寬毅)에 대해서도 그의 찬술(撰述)로 보아 그 위인을 알 수 있으며, 민지의 《여사(麗史)》(《편년강목》)도 문조(文藻)가 있다고는 하나, 심지가 바르지 못하고 성리학(性理學)을 몰랐다. 또 유점사기를 보면 민지의 위인을 알 만하다.
민지의 유점사기(楡岾寺記)에 ‘53불(佛)이 서역(西域)인 월지국(月氏國)으로부터 철종(鐵鍾)을 타고 바다를 건너 안창현(安昌縣)에 정박하니, 현재(縣宰)인 노춘(盧偆)이 나아가 영접하였다……’ 하였는데, 이 말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인다. 말이 몹시 괴망(怪妄)하여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항상 이를 말하며 배척하였다.
상고하건대 김관의와 민지의 말은 이와 같이 허망하나, 이익재(李益齋 이름은 제현(齊縣))ㆍ정인지의 변설에 옳게 말하였다. 이미 정문(正文)에 기록하였다. 익재가 《성원록(聖源錄)》을 인용하여 의조(懿祖)의 처(妻) 용녀(龍女)는 평주인(平州人)으로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한다면 대개 그 이름이 용녀인데, 허다한 괴설을 만들어내어 위의 모든 말과 그 어리석음이 동일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어떤 이가 묻기를,
“그대가 우리 나라 역사의 괴이설(怪異說)를 일체 산삭하여 진실로 사씨(史氏)의 요체(要體)를 살리면서 죽장릉(竹長陵)천사옥대(天賜玉帶)장의사(藏義寺)만파식적(萬波息笛)왕창근(王昌瑾)의 거울[鏡] 같은 내용을 괴이하다 하지 않고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치에는 상변(常變)이 있고 사실에는 허실(虛實)이 있게 마련이다. 이에 그대로 둔 것은 이치에 고증되어 그럴 수도 있는 사실이요, 여기에 산삭해 버린 것은 사람의 조작에서 나와 허위로 기필되는 사실이다. 이상의 허다한 괴설은 모두 망령된 선비들의 허위 조작인데, 가설로 여겨지는 것은 엄격히 깎아버려 허망의 습성을 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옥대(玉帶)ㆍ죽적(竹笛)의 사실을 정문(正文)에 써 둔 것은, 당시 임금들이 하늘을 속이고 한 세상을 미혹케 한 그 실수를 나타내려는 때문이다. 그리고 음병(陰兵)이 남몰래 도와준 일과 충혼(忠魂)이 국왕에게 보답한 상서로운 일에 대해서도 역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되기에 그대로 두고 산삭해 버리지 않았다. 중국의 정사(正史) 또한 이러한 예가 많다. 나는 이에 사실을 헤아려 취사(取捨)하였다.”
하였다.

[주D-001]계(啓)가 돌에서 나고 : 우(禹) 임금이 도산씨(塗山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녀가 돌[石]로 화하여 숭산(崇山) 밑에 있다가 계를 낳았다는 말이 있다. 《淮南子》
[주D-002]이윤(伊尹) 공상(空桑)에서 났다 : 선씨녀(侁氏女)가 뽕[桑]을 따다가 마른 뽕나무 밑에서 이윤을 얻었다 하여, 그곳 이름을 공상(空桑)이라 하였다는 말이 있다.
[주D-003]《삼국유사(三國遣事)》에는 그 말이 더욱 괴이하다 : 《삼국유사》에는 “알에서 나온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키니 못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日月)이 청명해졌으므로 그를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는 말이 더 첨부되었다.
[주D-004]유온(劉媼)의 용감(龍感) : 유온은 한(漢) 고조(高祖)의 어머니를 가리키는데, 교룡(蛟龍)에 감응되어 고조(高祖)를 낳았다는 말이 있다. 《史記 高祖本紀》
[주D-005]미장(迷藏) : 아이들의 놀이의 일종인 촉미장(捉迷藏)을 가리킨다. 곧 베[布]로 눈을 싸매고 하는 숨바꼭질.
[주D-006]구간(九干) : 가락국(駕洛國)이 처음 생길 때에 있었던 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도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오천간(五天干)ㆍ신귀간(神鬼干)의 아홉 수장(首長)을 가리킨다.
[주D-007]오가야(五伽倻) : 가락국(駕洛國)을 형성할 때 맹주국(盟主國)을 제외한 다섯 연맹체인 아라가야(阿羅伽倻)ㆍ고령 가야(古寧伽倻)ㆍ대가야(大伽倻)ㆍ성산 가야(星山伽倻)ㆍ소가야(小伽倻)를 가리킨다.
[주D-008]죽장릉(竹長陵) : 신라의 미추왕릉(味鄒王陵). 죽장릉에 쌓인 죽엽(竹葉)이 수만 명의 군사로 변하여 적을 물리쳤다는 말이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주D-009]천사옥대(天賜玉帶) : 하늘이 내려준 옥대(玉帶).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옥대를 전해 주었는데, 교사(郊社)ㆍ종묘(宗廟) 등 큰 제사에는 으레 이 옥대를 띠었다는 말이 있다. 《三國遺事》
[주D-010]장의사(藏義寺) :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절 이름. 신라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백제를 치기 위한 당(唐)의 청병(請兵)에 대해 고심하자, 이미 죽은 신하 장춘(長春)ㆍ파랑(罷郞)과 비슷한 사람이 홀연 왕 앞에 나타나 황제(皇帝)가 소정방(蘇定方) 등을 보내 백제를 치게 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려 주었다. 왕이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 곧 장의사(藏義寺)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장(藏)이 장(莊)으로 되었다. 《三國史記》
[주D-011]만파식적(萬波息笛) : 피리의 이름.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동해중(東海中) 나타난 거북머리와 같이 생긴 산 위의 대[竹]를 베어다가 피리[笛]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온다고 한다. 《三國遺事, 三國史記 雜志》
[주D-012]왕창근(王昌瑾)의 거울[鏡] : 상객(商客) 왕창근이 당(唐)에 와서 철원(鐵圓) 저자에 있다가 어떤 괴이한 사람으로부터 거울 하나를 샀는데, 해가 그 거울에 비치면 고시(古詩)와 같은 글이 나타났다 한다. 그 글의 내용은 대략 고려 태조의 등극과 삼국 통일(三國統一)을 예언한 일종의 도참(圖讖)이다. 《三國史記 弓裔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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