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 白頭山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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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의 기록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생성 :- 2011. 04. 30.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백두산


함경남도·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東北地方:滿洲)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 높이 2,744m(중국측 발표는 2,749.6m)이다.

최근에까지 활동을 하였던 휴화산(休火山)으로 북위 41°31′∼42°28′, 동경 127°9′∼128°55′에 걸쳐 있고, 그 총면적은 약 8,000㎢에 달하여 전라북도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한편,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熔岩臺地)가 펼쳐져 있어 백두산은 한반도와 멀리 북만주지방까지 굽어보는 이 지역의 최고봉이다.

백두산의 이름은 먼 옛날부터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산해경 山海經≫의 〈대황북경 大荒北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고 이름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대(漢代)에는 백두산을‘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남북조의 위(魏)시대에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하였고 또는 ‘도태산(徒太山)·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북사 北史≫에 “말갈국 남쪽에 종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라 하며, 세상사람들은 이 산을 받들어 모셨다. 사람들은 산상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용변을 본 뒤 그릇에 담아갔다. 산에는 곰·범·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위서 魏書≫와 ≪수서 隋書≫에 모두 도태산(徒太山)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북사≫의 종태산(從太山)은 도태산의 오자일 것이다. 당나라 때는 태백산이라 불렀고, 금(金)나라 때에 이르러 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우리 나라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백두산을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 또한 ≪고려사≫의 광종 10년조에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 쪽에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백두산의 명칭은 불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개마대산·도태산·태백산·백산·장백산·백두산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한대 이후 불리어진 명칭의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두산 산정은 거의 사계절 동안 백설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산정부는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雪〕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이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開國)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었다.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천지(天池)를 비롯한 절경이 많은 데다가 독특한 생태적 환경과 풍부한 삼림자원이 있어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는 산이다.

자연환경

〔지질·지형〕

백두산은 최근까지 활동한 휴화산으로 산세가 험준하고 지형이 복잡한 데다 대륙 쪽으로 열려 있고, 한반도 쪽은 고원과 2,000m 이상의 고산지가 둘러 있으며 급격히 동해로 이어지고 있어, 독특한 산지기후와 자연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는 냉각되어 화구(火口)에는 호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597년·1668년·1702년에 각각 백두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휴화산이다.

한반도에서 화산활동이 활발하였던 제3기(第三紀)에 화산폭발로 형성된 백두산의 중심 산정부는 알칼리성 조면암(粗面巖)으로 구성된 종상화산(鐘狀火山)이다.

중앙 화구는 그 뒤 함몰에 의하여 칼데라(caldera)가 되었고 여기에 강수와 융설수(融雪水)가 괴어 천지를 이루고 있다. 천지는 흔히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용담(龍潭)·온량박(溫凉泊)·도문박(圖門泊)이라고도 칭한다.

남북의 길이 4.9㎞, 동서의 너비 13.4㎞, 집수면적 21.41㎢, 수면의 면적 9.2㎢, 수면의 둘레 13.11㎞, 수면의 높이는 2,155m이다. 천지의 가장 깊은 곳은 312.7m(372m로 기록된 데도 있다)이고, 평균수심은 204m이다.

폭포의 높이는 68m로서 이 물이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이루어, 곧 송화강(松花江)의 원천을 이룬다. 천지 주변의 화구벽은 약 400∼500m의 높이로 거의 90도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화구호안(火口湖岸)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병사봉(兵使峰) 동쪽과 달문 부근뿐이다.

천지가 겨울에는 결빙하기 때문에 천지의 물이 겨울철에는 다만 지하암석의 틈을 통하여 밖으로 유출되다가 6월∼10월에는 달문을 통하여 넘쳐흐른다. 그런데 이 기간에 오랫동안 강우량이 적으면, 달문으로 넘치는 물이 끊어질 때도 있다. 근래의 통계로는 1978년 7월 달문의 물이 단류(斷流)된 일이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높이 2,155m의 산정에 천지처럼 큰 호수를 가진 산은 오로지 백두산뿐이다. 천지의 물은 강수량(융설량 포함)으로 보급되는 것이 약 60%이고, 지하수로 보급되는 것이 약 40%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천지의 총 적수량은 20억400만㎥이다.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높이 2,500m 이상의 산봉이 16개가 있다. 이 산봉들의 명칭이 우리 문헌에는 병사봉을 비롯하여 망천후(望天吼)·비류봉(沸流峰)·백암산(白巖山차일봉(遮日峰)·층암산(層巖山)·마천우(麻天隅) 등만 밝혀져 있다.

중국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최고봉인 백두봉(우리 나라에서는 병사봉, 또는 장군봉으로 칭한다)을 비롯하여 삼기봉(三奇峰)·고준봉(孤準峰)·자하봉(紫霞峰)·화개봉(華蓋峰)·철벽봉(鐵壁峰)·천활봉(天豁峰)·용문봉(龍門峰)·관일봉(觀日峰)·금병봉(錦屛峰)·지반봉(芝盤峰)·백운봉(白雲峰)·옥주봉(玉柱峰)·제운봉(梯雲峰)·와호봉(臥虎峰)·관면봉(冠冕峰) 등의 명칭으로 되어 있다.

윤광신은 저명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 15년 사직(司直) 박사수(朴師洙)가 윤광신을 갑산부사로 특별히 제수하는 명을 거두어 달라고 상소하지만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두산의 최고봉을 병사봉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1750년 이후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4기에 열하분출한 현무암은 개마고원의 일부와 만주에 걸쳐 동서 240㎞, 남북 400㎞에 이른다. 현무암대지의 수직단면의 지질을 보면, 제일 상층에는 기공(氣孔)이 있는 현무암으로 되어 있으며, 그 다음 층은 회색의 비교적 석질이 단단한 덩어리의 현무암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층은 원마도가 높은 자갈로 되어 있고, 맨 아래층은 현무암층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중간에 자갈층이 있다는 것은 현무암대지가 형성되기 이전에 상당 기간 유수(流水)에 의한 침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현무암층의 두께는 현무암의 분출량(噴出量)을 나타내는데 평균 200∼500m이며 500∼600m 되는 곳도 있다. 백두산 부근에는 500m 내외로서 두꺼우나 주변으로 가면서 점점 얇아진다.

백두산 동쪽 삼지연(三池淵, 둘레 2㎞, 깊이 3m)에서 신무성(神武城)을 지나 원지(圓池)에 이르는 일대는 높이 1,500m에 반경 30㎞의 광대한 평탄면(平坦面)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천리천평(千里千坪)이라 일컬어 왔는데, 이곳이 대표적인 용암대지의 지역이다.

이 대지 위에는 곳곳에 습원(濕原)이 있는데, 이는 현무암의 표토(表土)가 풍화되어 점토질로 변하여 불투수층(不透水層)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편, 비룡폭포에서 약 2㎞ 부근에는 온천군(溫泉群)이 있어 백두산은 아직도 잠재적으로 화산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산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처럼 백두산 일대의 지질은 생성연대가 짧기도 하고 또 암석 자체가 다공질(多孔質)인 현무암이어서 지표수의 흐름이 불량하기도 하여 하곡(河谷) 발달이 미약하다.

산의 곳곳에 유년기나 장년기의 곡이 분포하며 정상부 일대에는 하곡이 분명하지 않아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는 실제 천지까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산중턱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와 중국의 국경선이 분명하지 않아 국경선 분쟁이 야기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과거 빙하시대(氷河時代)에 만년설로 덮힘으로써 생성된 완경사 지형인 권곡(圈谷, kar)이 천지의 북쪽 화구벽에 분포하기도 한다.

〔기 후〕

기후의 수직적 분포가 뚜렷이 나타나 저지대에서 정상부까지 온대로부터 한대에 이르는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천지 주변의 기후는 고산기후의 특색을 이루어 겨울이 춥고 길며 바람이 세고 일기변화가 크다. 9월 하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다음해 5월까지 눈이 내리기 때문에 겨울이 9개월이나 된다.

1월 평균기온이 -24.0℃이고, 7월의 평균기온은 10℃ 내외이다. 최저기온은 1965년 12월 15일 -44.0℃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연평균 풍속이 초속 11.7m나 되며 12월이 특히 심하여 초속 17.6m에 이른다. 바람이 가장 센 곳은 높이 2,690m 지점에 있는 풍구(風口)라는 곳이다.

백두산 일대의 지형적 장애로 인하여 습기를 가진 대기가 강제 상승되거나 서쪽에서 이동해 오던 저기압계(低氣壓系)가 지연되므로 강수량은 주변지역보다 증가된다.

실제로 1959∼1970년의 연강수량은 1,407.6㎜에 달하여 우리 나라 최다우지에 해당한다. 기온이 낮아 적설기간은 9월 초에서 다음해 5월 말까지 약 9개월이나 되며 평균 적설심(積雪深)은 30∼50㎝ 정도가 된다.

지금까지 기록된 최심적설은 1930년의 150㎝였다. 산정부에 가까워질수록 운량과 강수일수가 증가하여 연중 청명한 날씨는 40여 일 정도이다.

〔생 태〕

기후의 수직적인 변화가 크기 때문에 식생의 차이도 뚜렷하고 종류도 다양하다. 대체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는 1,400여 종, 동물의 종류는 400여 종이나 된다.

식생을 고도별로 보면 높이 500∼1,050m 지대는 낙엽송·가문비나무·사시나무 등 침엽수와 자작나무·황철나무·분비나무 등 활엽수가 함께 혼재하는 혼합림지대이다.

높이 1,750m까지는 침엽수림지대로 침엽수의 원시림이 대수해(大樹海)를 이루고 있다. 높이 2,100m까지는 관목림지대(灌木林地帶)로 여름 최고기온이 10℃를 넘지 못하고 토양이 척박한 데다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이깔나무·월하나무 등이 주요 수종을 이룬다.

높이 2,100m 이상은 동토지대(凍土地帶)로 겨울 기온이 -45℃ 미만이며 연중 300일 이상 흐린 날이 계속되고 강풍이 불기 때문에 수목의 성장은 어려우며 털진달래·풍모버섯·바위솔·둥근잎버드나무 등 이런 환경에 적응한 식물들이 자생하는 이른바 한대림지대(寒帶林地帶)이다. 이 지대에 자생하는 식물종류는 총 170여 종에 이르며 3분의 1이 전형적인 북극식물이라 한다.

백두산 일대에 서식하는 조류로는 130여 종의 텃새와 70여 종의 철새가 있어 200여 종에 이른다. 그 중 백두산 특산인 원앙과 먹황새·꾀꼬리·파랑새·어치·꿩·노랑때까치·노랑할미새·오색딱따구리·수리부엉이·바위종다리·깔새 등이 주요 조류에 속한다.

역사와 문화유적

1285년(충렬왕 11)에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 고조선시대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백두산이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하느님의 작은아들 환웅(桓雄)께서 여러 차례 인간세계에 내려가고자 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뜻을 아시고 하계를 두루 살피시더니 태백(太伯) 곧 백두산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으로 여기시어, 곧 아드님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께서는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시어 그곳을 신시(神市)라 하시니, 이 분이 곧 환웅천황이시다.”

이른바 단군신화라고 불리는 이 기사의 무대가 다름 아닌 백두산이다. 단군신화가 반영하는 시대는 청동기문화의 등장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직까지는 백두산 일대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 보고된 바는 없다.

백두산은 사화산이 아니라 200∼300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휴화산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백두산은 한민족의 직접적인 거주지였다기보다는 불을 뿜어내어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특히, 인지가 발달하지 못한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신비로운 금단의 지역으로 여겼을 것이므로, 민족의 시원을 말해주는 신화의 무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백두산 지역은 민족의 기원설화를 안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거주가 제한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백두산 지역에서의 유물·유적의 발굴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숙신·부여·읍루 등의 북방유목민족 계통의 종족들이 백두산 주변에서 흩어져 살았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부여, 북쪽에는 읍루, 동북쪽에는 숙신, 동쪽에는 동옥저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백두산은 위의 여러 종족이 모두 성역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가 강성해진 이후에 백두산은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으며, 발해의 영토 안에 있었다. 연변 지역에는 발해가 건설한 많은 성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발해의 전기의 도성인 구국(舊國, 돈화현 오동성)과 5경 중의 동경 용원부(훈춘현 팔련성), 중경 흥덕부 등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발해의 영토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셈이므로, 비록 관련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발해시대에도 여전히 성역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후 백두산은 통일신라나 고려의 영역 외곽에 위치하여 북방 이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요를 건국한 거란이나, 금을 건국한 여진족의 발상지도 역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금은 1172년(명종 3)에 이 산을 산신으로 봉하여 영응왕(靈應王)이라고 하였고, 1193년에는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책봉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여진족이 백두산을 경계로 흥경(興京)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일대의 우량하(兀良哈)와 두만강 쪽의 오도리(幹都里) 우디거(兀萩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후금이 건국되자 백두산 일대를 자신들의 시원지로 간주하여 영경(靈境)이라고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대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이른바 금봉책(禁封策)을 실시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세종은 북방 야인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두만강 일대에 6진(경원·경흥·회령·부령·온성·종성)을 설치하였고, 1443년(세종 25)에는 압록강변에 4군(무창·자성·여연·우예)을 설치함으로써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천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백두산 일대는 너무나 광활한 데다 사람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선을 확연히 분획할 수는 없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헌 중에서 1677년(숙종 3, 淸 康熙 16)에 궁정내무대신인 무목납(武木納) 등 4인을 백두산에 파견하여 실황을 조사, 기록한 ≪장백정존록 長白征存錄≫이 최초의 백두산 답사기록일 것이다.

무목납 등은 5월에 북경을 출발하여, 6월에 서남쪽 만강(漫江)·긴강(緊江)이 합류하는 곳으로부터 등반하여, 6월 17일에 백두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하산하여, 8월에 북경으로 돌아갔다. 무목납이 강희제에게 올린 글 가운데, 백두산 산정의 경치를 묘사한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풀이 다한 곳으로부터 흰 자작나무가 있는데, 완연히 심은 것 같고, 향나무가 총생하고, 노란 꽃이 유난히 고왔습니다. 수풀을 걸어나와, 멀리 바라보니 구름과 안개가 산을 가리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지세를 보니 매우 완만한데, 편편히 보이는 흰빛은 모두 빙설이었습니다…. 산정에 못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둘러싸고, 물 가까이 솟아 있는데, 벽수는 매우 맑고 물결이 탕양히 일고, 못가에는 초목이 있었습니다.”

이 기록에서도 백두산에 인간의 유적이 있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712년(숙종 38) 5월에 청나라의 제의에 의하여 오라총관(烏喇總官) 목극등(穆克登)과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과 조태상(趙台相)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 비가 백두산에 전하는 금석문으로서는 최초의 유적이 될 것이다.

그 지점은 백두산의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 높이 2,150m의 분수령 지점이었으니, 합법적인 비도 아니며, 이른바 정계비라고 명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에서 “조상의 강토가 싸우지도 못해보고 줄어들었다.”라고 개탄한 바 있지만, 참으로 박권과 이선부의 무책임은 천추의 지탄을 받아도 마땅한 것이다.

이 비면에는 위에 대청(大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종서로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깎아 기록한다. 필첨식(筆帖植:청조의 서기관)·통관(通官:청조의 통역관) 강희 51년 5월 15일 조선 군관 이의복·조태상, 차사관 허량·박도상, 통관 김응헌·김경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정계비는 높이 72㎝, 아랫부분 너비 55.5㎝, 윗부분 너비 25㎝의 6각기둥 모양이다. 그러나 청이 정계비를 세운 이후에도 조선의 백성들이 월강(越江)하여 백두산 일대를 포함한 간도(間島)에 이주하여 개간을 하는 등 사실상 이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대동여지도≫ 해설문에서 백두산에 대해 “산줄기가 요동 들판을 가로지르며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이 산은 조선 산맥의 한아비라, 산에 삼층이 있는데, 그 높이는 200리가 되고, 넓이는 1,000리에 걸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으니, 이름을 달문이라고 한다. 둘레가 800리로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강이 된다. 백두산은 분수령 남북으로 길게 뻗쳐 연지봉·소백산·설한등령·철령 등에 걸쳐 있거니와 한 가닥이 동남으로 내달으며 치솟아 도봉 삼각산을 이루고 그 사이를 한강이 흐르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백두산을 수차 등반하였다고 하지만, 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李丙燾)는 “전하는 말에는 그가 국내 각처를 두루 찾아다니며 곳곳을 조사, 연구하고 백두산에도 여러 차례 올라간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교통관계나 그의 생활정도로 미루어보아 간혹 이상한 곳에는 몰라도 전국을 편답(遍踏)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여러 차례 백두산에 내왕하였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라고 김정호의 백두산 등정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백두산 부근을 상세히 표시한 ≪대동여지도≫를 보면, 김정호의 백두산 등정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여하튼 지도상에 백두산 일대가 가장 상세하게 알려진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비롯된다. 이 지도에도 국경선의 정확한 표시는 되어 있지 않다.

1881년(고종 18, 淸 德宗 7)부터 청이 금봉책을 철회하고 간도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 조선 백성의 소환을 요구하고, 이 지역의 귀속문제를 명확히 할 것을 희망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3년(고종 20)에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하여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였으며, 정계비의 ‘동쪽은 토문강’이라고 한 토문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인 토문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토문강과 두만강 중간에 있는 간도는 당연히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은 ‘토문’은 ‘두만강’의 다른 표기라고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1885년에는 이중광(李重光)을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삼고 청나라 대표와 함께 정계비를 재조사하게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감계담판이 이루어졌으나 청은 토문이 두만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간도지방에는 청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으며, 조선 백성들이 이 지역에 ‘사(社)’라고 불리는 자치기구까지 두면서 거주하고 있었고, 또한 주민의 8할을 차지하였으므로, 정계비의 자구 해석만을 고집할 문제는 아니었다.

1887년(고종 24)에는 청나라에서 다시 홍단수(紅丹水)를 경계로 국경을 정하려 하였지만, 우리측 감계사 이중하(李重夏)는 “이 머리는 베일지라도 국토는 줄일 수 없다(此頭可斷國土不可縮).”고 목숨으로 항거하여 청나라의 주장을 좌절시킨 일도 있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엄연히 다른 데도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면서 토문강 일대의 국토를 잃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의 세력 때문에 관철되지 못한 데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부설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철도부설권을 취하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줌으로써 간도지방인 연변(延邊) 일대에 현재 우리 동포가 180만 명이나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영토로 환원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침략했던 민족항일기에 있어서 백두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력항쟁의 기지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 되었다.

1920년 6월, 백두산 기슭의 봉오동(鳳梧洞)에서는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인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끄는 700여 명의 독립군과 일본군 제19사단의 병력이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120여 명을 사살하여 독립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하였다.

백두산은 이처럼 항일의 전승지로서 독립운동사에 그 이름이 빛날 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에도 백두산은 역시 민족혼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였다. 당시 붉은군대에 맞서 항쟁했던 젊은이들이 백두산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 개마고원유격대가 전투부대를 조직하여 북한군과 투쟁한 활약은 유명하다.

현재는 백두산이 천지 수면을 경계로 한·중 양국에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측 백두산에는 도처에 김일성선전탑을 세우는 등 개인숭배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근래에는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하였다고 날조하여, 성지에서의 출생을 강조함으로써 신격화하고 있는데 이처럼 백두산의 자연경관이 개인의 목적을 위하여 파손되어 가고 있다.

중국 측의 백두산 실황을 보면, 1958년 천문봉(天文峰)에 기상대를 설치하였고, 1960년에 백두산 일대 21만㏊의 면적을 ‘장백산자연보호구’로 설정하였으며, 1980년 3월에는 국제생물권보호구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백두산 지역의 산림과 동물이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또한 현재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여,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천문봉 기상대까지 자동차가 오를 수 있도록 도로도 개설하였고, 온천지대 부근에 온천욕실도 만들어 놓았고, 국내인들을 위한 여관과 귀빈을 위한 ‘백산초대소(白山招待所)’도 아담하게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스케이트장·임업국·자연보호구관리국 등이 있다. 특히 두도백하(頭道白河) 근처에서 나오는 장백약수천(長白藥水泉)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에서 아름다운 자연환경 내에 요양원을 설립하여 우리 동포들에게 피서와 요양지로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약수는 포장하여 중국 내외에 공급되고 있다.

백두산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곳이라 유물·유적이 거의 없다. 목극등이 비를 세우면서 백두산에 대하여 남긴 기록에,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용담이라 하고, 그 둘레는 70리나 되지만 깊이는 알 수 없다. 물은 북소리를 내듯이 솟고, 돌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뢰와 같은데, 항상 구름 가운데 자옥하게 싸여 있어, 또한 천지라고도 부른다. 못은 다 돌로 되어 있으나, 물에 뜰 정도로 가벼운 것은 분가루 같고 모양은 허파처럼 되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근래의 천지의 모습과 동일하지만, 역시 유적에 대하여 별달리 언급한 바 없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터전을 잡았던 신시라고 하는 천평(天坪)에 대하여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에서도 그 광활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어떤 유적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899년에 러시아 작가 가린이 쓴 백두산 기행문에서도 천지의 신비로움에 대하여 극찬하였으나, 별다른 유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천지의 달문 부근에 백두산 신령을 받들던 종덕사(宗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29년에 건립되었으며, 팔각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팔괘묘(八卦廟)라고도 칭하였다. 근래 폭우로 인하여 파괴된 뒤, 그 절을 지키던 승려도 종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괴물은 황금색으로 머리는 큰 화분만 하고, 두상에는 뿔이 있고, 긴 목에는 수염이 많은데, 머리를 숙여 흔드는 모습이 마치 물을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사냥꾼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겁이 나서 황급히 산꼭대기로 향하였다. 산 중턱쯤 올랐을 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 사냥꾼들이 뒤를 돌아다보니 물 가운데 있던 괴물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모두 그 괴물이 황룡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기록은 앞에서 인용한 국내외의 조사보고를 볼 때 사실로 믿기 어렵다. 특히 근래 중국측에서 자세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두산 천지 주변은 현무암의 고산준령으로서 초목이 살지 못하고, 수중에는 유기질과 부유생물이 극소하기 때문에 천지 중에 대형 척추동물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도 천지에 괴물이 있음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어 관심사가 된 바 있다. 첫번째는 1926년 8월 중순 길림성 기상기재 공급소에서 일하는 주봉영(周鳳瀛)의 목격담이었고, 두 번째는 1980년 8월 21일 중국 현대작가 뇌가(雷加)와 다른 사람들의 목격담이었고, 세 번째는 1981년 7월 20일 북한 과학시찰단의 목격담이었다.

이상과 같이 천지에 나타난 괴물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영국 스코틀랜드협곡의 네스호에서 나타났던 공룡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약 6500만 년 내지 1억7000만년 전 주로 해양 중에 생존하였던 파행동물(爬行動物)의 후예가 일찍이 해수의 침입도 없었고, 화산활동이 근래까지도 되었던 백두산 지역에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고려시대 이전에 백두산을 등반한 기행문은 찾아볼 수 없고, 1764년(영조 40)에 함경북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 〈백두산유록 白頭山遊錄〉이 처음이 될 것이다.

〈백두산유록〉의 내용에 의하면,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趙榮順)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행기를 찾아볼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다.

또한 이 유록 중에, 홍계희(洪啓禧)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이 밖에 영조 때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집 保晩齋集≫ 속에도 〈유백두산기 遊白頭山記〉가 있다.

근래의 자료로는 1927년에 간행된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가 있고, 1931년에 간행된 안재홍(安在鴻)의 〈백두산등척기 白頭山登陟記〉가 있다.

두 저자가 모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면서, 백두산의 실경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민족 정기를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두산에 대한 기행문학으로서는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가 처음이 될 것이다.

근래 외국인의 백두산에 대한 탐사기록으로는 우선 1900년에 러시아에서 간행된 ≪한국지 韓國誌≫를 들 수 있다. 〈한국의 지리〉 속에 인용된 스트렐비츠키의 백두산등정기에서는 백두산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6일 동안 우리는 빽빽한 타이가를 통과하였다. 드디어 탄바이에서 60㎞ 떨어진 부르토파라고 불리는 자연경계선 뒤에서부터 숲은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도를 더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 앞에는 8∼10㎞ 정도 떨어진 곳에 백두산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화산은 넓은 기저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기저는 커다란, 그러나 완만히 상승되는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산기슭에는 몇 개의 작고 둥그런 언덕들이 있었는데 그 언덕들은 주봉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백두산과 비교하여 볼 때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더욱 더 선명하게 백두산의 높이를 부각시켜 주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보기에 백두산은 바위가 많고 외떨어져 있는 산이었다. 백두산 기슭에서 약 2,000피트 솟아 있었으며 평평한 책상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윗부분이 약간 잘려져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지점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분화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지 않았다. 대체로 산의 빛깔은 회색빛이 나는 희뿌연 색이었으나 햇빛이 미치지 않은 깊은 골짜기에는 벌써 눈이 쌓여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옆면의 경사를 따라 가늘고 밝은 하얀 산들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백두산을 등반한 것은 제1차 탐행이 1942년 여름이었고, 제2차 탐행은 1943년 여름이었다. 제1차에는 총 75명의 대원으로 혜산(惠山)에서 출발하였고, 제2차에는 총 85명의 대원으로 주대(主隊)는 무산에서 출발하고, 지대(支隊)는 혜산에서 출발하여 신무성(神武城)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을 등반하였다.

이 책의 제1부는 해설과 탐행기록, 제2부는 사진, 부록에는 대만·천도(千島쿠릴열도)·캄차카의 산들로 나누어 편찬되어 있다. 비록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영토확장의 목적으로 탐행한 기록이지만, 광복 전에 백두산을 탐사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백두산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산의 높이, 폭포의 높이 등 부정확한 기록이 발견되며, 기행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1982년 북경에서 간행한 정흥왕(丁興旺)의 ≪백두산천지≫는 백두산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조사, 연구한 기록으로서 백두산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백두산에 대한 특이한 기행문으로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기자였던 이관구(李寬求)가 비행기로 관찰한 백두산의 비경을 〈백두산탐험비행기 白頭山探險飛行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중앙일보≫에 1935년 10월 11일부터 그 해 11월 10일까지 연재하였다.

비록 필자의 표현대로 주마간산도 아닌 비행간산(飛行看山)이지만, 필자의 유려한 필치로 과거 어떤 백두산 기행보다도 기행문학으로서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현대시로 백두산을 읊은 시는 최남선의 〈조선유람가〉와 〈귀명가〉를 비롯하여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참전시인 장호강(張虎崗)의 〈내가 쓰러지거든〉을 보면 “끝내 바라던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채/ 이름도 없는 싸움터 산마루에 내가 쓰러지거든/ (중략)/ 정녕 그 어느날이고/ 바스러진 해골 가루가루 싸락눈처럼 휘날리어/ 천고에 깊은 천지 속으로 영원히 잠들 것이리라.”로 되어 있는데, 같은 민족으로서 분단된 국토에서 동족상잔의 아픔과 한이 여실히 표현된 작품이다.

진태하(陳泰夏)는 1984년 7월, 국토분단 이후 한국 국적으로서는 최초로 민족의 성역 백두산을 등정한 감격을 ‘백두산’이라는 시로써 토로하였다.

“민족도/ 국토도/ 분단된 슬픈 역사 속에/ 통일의 그 날을 기다려/ 하마하마 사십년/ 세월의 기만(欺瞞)에/ 분노는 열화처럼/ 이역(異域)길 돌아 돌아/ 아득한 신비의 빛을 따라/ 신들린 걸음으로/ 민족의 성지(聖地), 국토의 시원(始原)/ 백두산을 찾아/ 장강(長江)을 넘고 황하(黃河)를 건너/ 잃어버린 우리의 땅/ 만주(滿洲)벌 수만리(하략).”

최근의 백두산에 대한 장편시로서는 1987년 발행한 고은(高銀)의 ≪백두산≫이 있다. 이 시는 전체 4부로서 8권을 출간할 예정인데, 현재 1부 2권이 발간되었다.

머리말에서 “그런데 시의 시발인 백두산은 정작 자료와 상상의 세계로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저자는 백두산을 등반해 보지 못하고 작자의 상상과 동경 속에서 백두산을 묘사하였다.

이 시의 서시를 보면 “장군봉 망천후 사이 억겁 광풍이여/ 그 누구도 다스리지 못하는 광풍이여/ 조선 만리 무궁한 자손이 이것이다/ 보아라 우렁찬 천지 열여섯 봉우리마다/ 내 목숨 찢어 걸고 욕된 오늘 싸워 이 땅의 푸르른 날 찾아오리라.”라고 쓰여 있다.

북한에서도 〈백두산〉이라는 장편 서사시가 발표된 바 있으나 백두산을 무대로 한 김일성의 행적을 미화한 것으로, 문학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근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안수길(安壽吉)의 〈북간도 北間島〉를 들 수 있다. 1959년 4월 ≪사상계 思想界≫에 제1부가 발표되면서 시작하여 1967년에 제5부로서 완료되었다.

문학평론가 백철(白鐵)은 이 소설에 대하여 “해방 뒤 10여 년 내의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북간도〉가 아니던가 느껴진다. 그만큼 〈북간도〉는 근래의 우리 문학사를 대표한 작품인 줄 안다.”라고 평하였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북간도가 배경으로 되어 있으나, 백두산 일대의 묘사와 그에 얽힌 전설도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삶의 강인한 정신력이 등장인물 중 한복이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한복이는 백두산의 혼을 닮아 있다. 그 밖에 이미륵(李彌勒)도 그의 저서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백두산 주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백두산은 민족 발상의 성지로서 이에 대한 전설도 적지 않다. 백두산에 대한 전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탓이겠지만, 특히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많이 전래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서 수집하여 발간한 전설 고사집 속에 백두산에 관한 전설로,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백두산의 사냥군과 호랑이〉·〈오늘날 왜 호랑이가 보기 드문가?〉·〈백두산의 화마〉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는 우리 민족의 발상과 재미있게 연관을 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마치 신앙처럼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의 개국신화 외에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왕건의 아버지 융(隆)이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승려 도선(道詵)을 만나 성자를 낳을 집터를 얻음으로써 왕건을 낳고, 그 성자가 자라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 단군의 자손인 우리 민족을 수시로 괴롭히던 이민족의 집단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래비가 내리어 그 지역을 덮어버렸다. 그리하여 지금도 백두산 밑 무산땅 최가령 동쪽에 표면은 흙이지만, 파보면 5∼6척이나 모래가 덮여 있고 그 속에는 또 흙이 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에는 우리 민족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의 발상설화도 얽혀 있다. 청나라에서는 자기들의 조상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상하여, 1677년에는 대신 각라식목눌(覺羅式穆訥)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탐사하였으며, 1684년에는 장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옹정제(雍正帝) 이후는 길림장군(吉林將軍)의 관리하에 춘추로 중월(仲月)에 제사를 지냈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두만강변에 지암이라는 바위 근처에 이좌수가 살았는데, 지암 물가에 사는 수달의 일종인 노라치라는 짐승이 좌수의 딸과 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커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은 높이 2,155m의 고원에, 곧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호수인 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거듭 폭발한 화산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산세 또한 기승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이기 때문에 그 실경 자체가 미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많은 화가들이 백두산의 신비를 화폭에 담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민경찬(閔庚燦) 등의 대작이 있다.

사진 작품으로는 진태하가 1985년 3월에 ≪조선일보≫에 보도하면서 전국에 백두산의 천연색 사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산에 대한 음악은 우리의 국가(國歌)로부터 적지 않은 노래들이 있다.

이 가운데 〈조선 유람가〉는 1947년에 최남선이 작사하고 김영환이 작곡한 것으로 당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애창하였던 노래다. “대지의 거룩한 힘 기둥이 되어/ 한울을 버틔고 선 백두의 성산/ 맹호의 수파람이 울리는 거기/ 성인이 나셨고나 영웅 길럿네….”

박영만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작곡한 〈압록강 행진곡〉은 제목과는 달리 주로 백두산을 노래하였다. 또한 1985년 진태하가 작사하고 황문평이 작곡한 〈아! 백두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홍익인간 터잡은 백두산 이지구의 정수리/ 단군왕검 태나신 천지연 오색으로 넘치고/ 바위마다 새겨진 배달의 민족역사 드높다/ 아 아 민족의 성역 백두산에 모여서/ 남북의 아들딸아 민족의 정기를 높이자/…….”

이처럼 우리 나라에 있어서 백두산은 단순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배달겨레의 가슴마다 깊숙이 아로새겨 존재하는 민족의 영산이요, 국토의 성역(聖域)이요, 통일된 신앙이다.

단군왕검으로 줄잇는 민족의 생명이 이곳에서 시원하고, 바다 멀리 제주도·울릉도까지도 국토의 맥이 이곳으로 줄닿고, 민족 역사의 뿌리가 이곳에 터잡고 있음을 믿어 왔기 때문에, 반만 년 애환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면면히 동경의 성산(聖山)으로 숭상하여 온 것이다.

우리의 개국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전설·설화·시·소설·수필 등 우리 민족의 전통문학과 관련지어지지 않은 작품이 없을 만큼 유구한 역사의 맥을 잇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을 ‘백두산족’이라고 자처할 정도로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의 가슴 속에 백두산의 혼이 잠재되어 있다.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에서 “비유컨대 조선 사람이 백두산 속에 있음을 잊어버린 것은 물 속의 고기가 물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할까요.”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세계 도처에 퍼져 살면서, 때로는 이미 국적을 달리하고 있으면서도 ‘백두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국을 생각하게 되고, 향수에 젖어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강탈당하였던 민족항일기에도 백두산은 곧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곧 VOA(미국의 소리) 우리말 방송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될 때, 그 방송의 시작을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세 번 낸 다음 아나운서가 “백두산 호랑이”하면서“여기는 자유의 소리 우리말 방송입니다…….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방송하였다.

일제침략하에 방송도 마음대로 못 듣던 시절,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로 시작되는 이 방송은 우리 동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 독립심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이 방송에서 ‘백두산’이라는 말이 빠져 있었다면 그처럼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가사는 아직도 확실한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민족이 고난에 처하여 있을 때, 누군가의 입에서 불리어진 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곧 민족이 수난을 당하던 때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고 가사를 지은 것은 단순히 조국의 영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민족혼을 잃지 말자고 피를 토하듯 외친 것이다.

백두산은 일찍이 그 명칭이 ‘불함(不咸)’, 즉 신(神)의 산으로 일컬어 온 것처럼 한결같이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신성시되어 있는 점이 세계 어떤 산과도 다른 점이다.

그 실증으로 ≪북사≫와 ≪봉천통지 奉天通志≫에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준비해 간 그릇에 담아 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외경(畏敬)받는 산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 때, 편찬된 ≪괄지지 括地志≫에는 백두산의 조수초목(鳥獸草木)은 모두 백색이라고 기록할 만큼 상서로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서명응의 ≪유백두산기≫에 실려 있는 제문을 보면 “높다란 백두산은 우리 나라의 진산으로 온 백성들이 우러러 봅니다. 진작부터 전모를 근참하려고 벼르다가 이제야 왔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찬 바람 찬 이슬 맞으며 갖은 고초를 겪고 왔습니다. 산신령께서는 이런 정성을 살피셔서 구름과 안개를 거두시어 마음대로 근참하게 하소서. 하늘에는 해와 별이 환하여 감추는 게 없사온데, 산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하늘의 뜻을 어기면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백두산을 등정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 제문에 공감할 것이다. 백두산 일대에는 천변만화로 삽시간에 변모하는 가공할 날씨에 누구나 인간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하늘에 의지하여 빌 수밖에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백두산은 우리 민족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언제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화합 단결하고, 하늘과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신앙심을 낳게 하였으며, 미래의 밝음으로 지향하는 우리 한민족의 내일을 있게 하였다.

자원

〔부존자원〕

백두산 천지 주변 반경 70㎞ 내에는 백색의 부석(浮石 또는 輕石)이 뒤덮고 있는데 구멍이 많고 가벼워 건축시 경골재(輕骨材)로 활용도가 크며 경제성도 매우 높다고 한다.

또 이 부석으로 벽면을 만들면 경비가 저렴할 뿐만 아니라 천연단열제로 실내 보온효과도 크다고 한다. 무진장으로 있는 이 경석은 앞으로 좋은 자원이 될 것이다.

천지의 수질은 무색, 무취로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플랑크톤이 없어서 물고기는 물론 개구리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천지 물 전체가 전혀 오염되지 않아 식수로서 최적조건을 갖추고 있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부터 천지에 산천어를 양식하여 1999년 현재 상당량의 물고기가 천지에서 서식되고 있다. 앞으로 천연식수로서 개발이 기대되는데 이미 중국에서는 미네랄워터로 포장하여 홍콩으로 수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백두산 일대에는 지하자원도 매우 풍부하게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속광이 50여 종이고, 비금속광이 40여 종인데, 주요 자원으로는 금·은·알미늄·동·아연·망간·석탄·석유·석면·석회석 등이 있다.

백두산의 총면적은 약 8,000㎢인데, 이 광활한 산지는 높이 약 2,000m 이상의 고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산림으로 덮여 있는 문자 그대로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백두산 일대는 우리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 동북지방에 있어서도 산림자원이 가장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두산 일대에 자생하는 식물은 약 1,400여 종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경제성이 높은 식물만도 800여 종이나 된다. 북한지역 내 백두산에 대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중국쪽 백두산의 지역 가운데 보호구에 속하는 21만㏊ 내의 목재 총량이 4,700만㎥나 된다.

고도 1,100m 이하 지대는 적송(赤松) 위주의 침엽수와 활엽수로서 가장 전형적인 산림지대를 이루고 있고, 1,100∼1,800m의 침엽수지대에는 적송·전나무·낙엽송·가문비나무 등이 사계절 내내 상록의 밀림을 이루고 있고, 1,800∼2,000m의 자작나무지대에는 거의 잡목이 섞이지 않은 자작나무의 밀림을 이루고 있다.

이도백하(二道白河) 부근에 자생하는 미인송(美人松)은 표피가 귤황색으로 약 40∼50m씩 수직으로 자라기 때문에 최양질의 재목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원목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뗏목이나 혜산(惠山)∼대평(大平) 간의 백두산 임산철도·혜산선·백무선(白茂線) 등을 통해 길주(吉州)·무산·만포 등지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제재(製材)된다.

백두산 지역의 또 다른 임산자원으로 각종 약재(藥材)를 들 수 있다. 백두산 3보(三寶)에 속하는 산삼과 녹용을 비롯하여 많은 동물성 및 식물성의 약재가 생산되기 때문에 세계적인 천연한약재의 보고(寶庫)를 이룬다.

〔관광자원〕

백두산은 그 높이로 보아서는 별로 높은 산이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중국의 오악(五嶽)에 비교하여, 동악인 태산(泰山)의 웅장함도 없고, 서악인 화산(華山)의 준험함도 없고, 남악인 형산(衡山)의 수려함도 없고, 북악인 항산(恒山)의 그윽함도 없고, 중악인 숭산(嵩山)의 신기함도 없으나, 특이한 분화구를 가진 백두산의 수직적인 자연경관과 생태체계는 오악도 따를 수 없는 세계적인 영산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더욱이 높이 2,155m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천지를 가진 산은 이 지구상에 오로지 백두산뿐이며 물이 흘러 들어오지도 않는데, 주야로 넘쳐 거대한 비룡폭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근래 미국·캐나다·일본·서독 등에서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백두산에는 온천수가 많이 분출되어, 앞으로 세계적인 온천관광지로서 발전할 수 있다. 이 백두산 온천은 약 5,000㎡의 면적에 걸쳐 온천군을 이루고 있다.

이도백하가 이 온천군의 가운데를 지나가는데, 이 하안(河岸) 우측에 온천물이 솟아나는 온천안(溫泉眼)이 집중되어 있다. 온천안은 모두 13개인데, 비교적 큰 것은 여섯 개다.

온천물은 주야로 부단히 솟아 넘치는데, 각 온천 안에서 솟아나는 물의 온도는 각각 다르다. 그 중 가장 뜨거운 것은 82℃에 달하며, 최저의 것은 37℃이다.

13개의 온천안 가운데 일곱 개는 60℃ 이상으로서 고열온천에 속하고, 세 개는 41℃에서 59℃에 이르는 중열온천에 속하며, 나머지 세 개는 37℃∼38℃에 이르는 저열온천에 속한다.

분출되는 온천수의 양은 제5·제8호의 온천안이 비교적 많고, 제1호와 제9호는 비교적 적다. 중급에 속하는 제3호 온천안의 수량을 측정하여 보면, 시간당 약 2.4㎥가 분출된다.

수량도 항상 한결같고, 수온도 사계절 중 변함이 없다. 이들 온천안 부근에서는 유황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이것은 곧 온천물 중에 황화수소(H₂S) 기체가 함유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 온천물에는 칼슘과 마그네슘의 중탄산염〔重炭酸鹽, Ca(HCO₃)₂·Mg (HCO₃)₂〕이 함유되어 있다. 그러므로 백두산 온천물은 특히 피부병·관절염·풍습병 등에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약수가 분출되는 냉수천(冷水泉)이 있는데 두도백하(頭道白河) 서쪽 물가 현무암벽의 틈에서 분출된다. 이 물의 온도는 항상 8℃를 유지하며, 그 물맛이 너무나 시원하고 산뜻하여 천연사이다라고 부른다.

수질조사에 의하면, 1ℓ당 이산화탄산가스가 1,500㎎, 중탄산근 1,400㎎, 마그네슘 134㎎, 칼슘 110㎎, 나트륨 150㎎이 함유되어 있어, 위장병이나 심장병 등 만성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약수량은 하루에 약 4만ℓ가 용출된다.

이렇듯 빼어난 자연경관과 양질의 온천 및 약수, 고산지대의 서늘한 기후조건 등 관광개발의 좋은 입지조건을 구비한 백두산 일대는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피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북한에서는 이 지역에 대규모 벌목공사를 하고 고산지개발을 위하여 산정부까지 케이블카를 건설하는 등 개발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개발은 동시에 환경의 파괴를 동반하는 까닭에 종합적이고도 장기적인 안목의 개발계획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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