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林智) 관련 조선왕조실록 기록 鎭川(常山)林氏

좌측의카테고리항목을 크릭하시면 많은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임지(林智) 관련 조선왕조실록 기록

자료출처 :- 조선왕조실록   
자료생성 :- 2011. 04. 29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

임지(林智) 는 鎭川林氏 5세 先祖님 입니다.


成宗實錄> 成宗實錄 六年(1475年)> 六年 三月> 成宗 6年 3月 15日


[국역]


성종 53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3월 15일(갑자) 2번째기사
평석숭·정대희·유계근 등의 고신을 돌려 주게 하다


이조
(吏曹)에 전지(傳旨)하여 평석숭(平石崇정대희(鄭大禧유계근(劉季根윤유덕(尹由德우창신(禹昌臣견석명(甄碩明박유(朴有고운수(高雲秀장보인(張寶仁유자문(柳子文김맹규(金孟規이승번(李承蕃이희철(李希哲고신교(高愼喬심담(沈淡김장수(金長壽민종(閔悰김계손(金繼孫장은(張隱임지(林智강이례(姜以禮전효근(全孝根신근(愼謹주흥서(朱興序최순(崔順강호생(康好生박시맹(朴時萌)의 고신(告身)을 돌려 주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9209

분류*인사-관리(管理)


[원문]

成宗 53卷, 6年(1475 乙未 / 명 성화(成化) 11年) 3月 15日(甲子) 2번째기사
평석숭·정대희·유계근 등의 고신을 돌려 주게 하다


○傳旨吏曹, 還給平石崇鄭大禧劉季根尹由德禹昌臣甄碩明朴有高雲秀張寶仁柳子文金孟規李承蕃李希哲高愼喬沈淡金長壽閔悰金繼孫張隱林智姜以禮全孝根愼謹朱興序崔順康好生朴時萌告身。




[이미지]




이해를 돕기위해/ 임충섭


1) 이조
(吏曹) :-

고려시대·조선시대 문선(文選훈봉(勳封고과(考課)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 육조(六曹)의 하나이다. 동전(東銓천관(天官)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문종 이래로 문선(文選훈봉(勳封) 등에 관한 일을 맡도록 규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태조 1) 문선·훈봉·고과(考課) 등에 관한 일을 맡도록 규정되었는데 이것이 경국대전에서 확정되었다. 그러나 실제 기능은 왕권이나 여러 정치기구와의 역학관계로 강약이 되풀이되었다. 속사(屬司)로서 고려시대에는 고공사(考功司)만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문선사(文選司고훈사(考勳司)를 늘려 설치해 운영하였다. 속아문(屬衙門)1405(태종 5)에 승녕부(承寧府공안부(恭安府종부시(宗簿寺인녕부(仁寧府상서사(尙瑞司사선서(司膳署내시부(內侍府공신도감(功臣都監내시원(內侍院차방(茶房사옹방(司饔房)이 편속되었다.

 

러나 이후 부분적으로 신치(新置이속(移屬도태(淘汰)되었다. 그러다 경국대전에서 종부시·상서원·내시부·충훈부(忠勳府사옹원·내수사(內需司충익부(忠翊府)로 되었다. 운영면에서 조()와 속사를 보면, 돌발사·중대사일 경우 판서·참판·참의가 속사를 지휘하면서 처리했다.

 

그리고 일상사는 속사에 편제된 정랑·좌랑이 중심이 되어 수행하였다. 조와 속아문은 형식적으로나마 국가의 전 권력을, 육조와 소수의 당상관을 매개로 하여 국왕에게 예속시키려는 노력으로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속아문사의 대부분은 자율적으로 처리되었다.

 

중대사·돌발사와 기능이 중시된 일부 속아문에 한하여 겸관(兼官)하거나 조와 협의해 수행하였다. 구성을 보면, 982년에는 어사(御事시랑(侍郎낭중(郎中원외랑(員外郎) 등이 있었다.

 

그 뒤 대전통편에서 정랑·좌랑이 각각 1원씩 감소되었을 뿐 189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외에 고려시대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나 평장사(平章事) 등이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를 겸하고 조를 감독했기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의정(議政)이나 찬성 등이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하고 인사에 간여하여 견제를 당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판서는 인수부제조(仁壽府提調)와 비변사의 제조, 참판은 군기감(軍器監)의 제조, 참의는 소격전(昭格殿)의 부제조를 예겸(例兼)하면서 해당 사의 사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 이조를 우대하여 참의는 임기가 만료되면 종2품계로 승계, 체직됨이 보통이었다. 이조는 주관(周官)에 따라 처음부터 육조 가운데 첫 번째 서열이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해 서열이 조정됨에 따라 법제상으로도 첫째 자리를 차지했다.

 

따라서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 공양왕 때 전리사(典理司)를 이조로 개칭한 것을 그대로 계승해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시켰다.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太祖實錄

참고문헌定宗實錄

참고문헌太宗實錄

참고문헌世宗實錄

참고문헌高宗實錄

참고문헌純宗實錄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大典會通

참고문헌六典條例

참고문헌韓國史-近世前期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8)

참고문헌高麗政治制度史硏究(邊太燮, 一潮閣, 1971)

참고문헌提調制度硏究(李光麟, 東方學志 8, 1967)

참고문헌朝鮮備邊司考(李載浩, 歷史學報 50·51, 1971)

참고문헌院相制成立機能(金甲周, 東國史學 12, 1973)

참고문헌朝鮮初期 議政府硏究(韓忠熙, 韓國史硏究 31, 1980)

참고문헌朝鮮初期 六曹硏究(韓忠熙, 大丘史學 20·21, 1982)

 


2) 고신(告身) :-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 사령장·사첩(謝帖직첩(職牒·職帖관교(官敎교첩(敎牒)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와 조선 양시대의 고신 서식이 약간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문무관 4품 이상 고신과 문무관 5품 이하 고신의 서식이 서로 다른데, 4품 이상의 고신은 교지로 발급되며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5품 이하의 고신은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왕명을 받아 발급되었으며,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을 찍었다.

 

당상관처(堂上官妻)의 고신과 당하관처(堂下官妻)의 고신 서식도 서로 달랐다. 고신은 그 가문의 명예와 관계되는 것이므로 고문서 가운데 가장 많이 전래되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2,725건의 교지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2,006건의 교지와 교첩 가운데 대부분이 고신이며, 각 가문에 전존되고 있는 고문서 가운데도 상당수가 고신이다. 이러한 고신은 조선시대의 관료정치 및 양반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星州都氏宗中文書(寶物 724)

참고문헌朝鮮史料集眞(朝鮮史編修會, 1937)

참고문헌韓國古文書硏究(崔承熙,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1)

 

백과사전 카테고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개념·용어 > 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문헌 > 고문서 > 관문서

 







이글루스 가든 - 鎭川林氏 자료
이글루스 가든 - 鎭川林氏 자료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