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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卷第十三 髙句麗本紀 第一 의 백두산 관련 기사

자료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입력 :- 2011318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영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 三國史記  卷第十三 髙句麗本紀 第一
  •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 一年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기원전 37년 미상 음력)
시조 동명성왕 (東明聖王) [註 001] 은 성이 고씨(高氏) [註 002] 이고 이름은 주몽 (朱蒙) [譯註 001] 이다.추모(鄒牟) 또는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 [譯註 002] 해부루 (解夫婁) [註 003] 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찾았다 [譯註 003] . 그가 탄 말이 곤연 (鯤淵) [譯註 004] 에 이르러서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 개구리 [譯註 005] 모양이었다.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왕이 기뻐서 말하기를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하고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 (金蛙) [註 004] 라 하였다. 그가 장성함에 책립하여 태자를 삼았다. 후에 그 재상 아란불 (阿蘭弗) [註 005] 이 말하기를 “일전에 하늘이 나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다. 너희는 그곳을 피하라. 동해의 물가에 땅이 있는데 이름이 가섭원 (迦葉原) [註 006] 이라 하고 토양이 기름지고 오곡(五穀) [譯註 006] 이 자라기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아란불 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 (東扶餘) [註 007] 라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떤 사람이 있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 (解慕漱) [譯註 007] 라고 칭하며 와서 도읍하였다 [譯註 008] . 해부루 가 죽자, 금와 가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때에 태백산 (太白山) [譯註 009] 남쪽 우발수 (優渤水)에서 여자를 만났다 [譯註 010] . 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 (河伯) [譯註 011] 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 (柳花) [譯註 012] 입니다. 여러 동생 [譯註 013] 들과 더불어 나가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 라 하고 저를 웅심산 (熊心山) [譯註 014] 아래로 유인하여 압록강 [譯註 015] 변의 방안에서 사랑을 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벌로 우발수 에서 살게 되었습니다.”라 답하였다. [譯註 016]
금와 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비취어 몸을 끌어당겨 햇빛을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와 비쳤다. 이로 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譯註 017] 알 하나를 낳았는데 [譯註 018] 크기가 5 승(升)쯤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나중에는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이를 가르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 나이 일곱 살에 영리하고 예사롭지 않아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 [譯註 019] 이었다. 부여 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을주몽(朱蒙)이라 [譯註 020] 하는 까닭에 이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금와 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늘 주몽 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 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 (帶素) [譯註 021] 가 왕에게 말하기를 “ 주몽 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또한 용감합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를 제거할 것을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 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적게 먹여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譯註 022] . 왕이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 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 이 활을 잘 쏘아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 이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주몽 의 어머니가 몰래 이를 알아차리고 알려주며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찌 가지 못하겠는가?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는 것은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주몽 이 이에 오이 (烏伊) [譯註 023] · 마리 (摩離) [譯註 024] · 협보 (陜父) [譯註 025] 등 세 사람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 (淹㴲水) [註 008] 일명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압록강 동북쪽에 있다. 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는데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봐 두려워 물에게 알려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 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좇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譯註 026]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 이 건널 수 있었다 [譯註 027] .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 이 가다가 모둔곡 (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 [譯註 028] 에서 음술수 (音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譯註 029]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마의(麻衣)를 입고, 한 사람은 납의(衲衣)를 입고, 한 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 이 “너희들은 어디 사람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마의를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이 재사 (再思) [譯註 030] 입니다.” 하고, 납의를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이 무골 (武骨)입니다.”하고, 수조의를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 (默居)입니다.”라 하였으나, 성(姓)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 재사 에게 극씨(克氏), 무골 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 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씨를 주고 [譯註 031] , 무리에 일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3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에 이르렀다≪위서≫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註 009]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 과 물이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 (沸流水) [譯註 032] 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 (高句麗) [註 010] 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로 씨(氏)를 삼았다 [譯註 033] 혹 이르기를 “주몽이졸본부여 [譯註 034] 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어주몽을 보고는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주몽이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譯註 035] 이때 주몽 의 나이가 22세로, (漢) 효원제 (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 (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복종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譯註 036] 부락에 잇닿아 있어 침입하여 훔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 이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이 비류수 가운데로 나뭇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상류에 있는 것을 알고,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 (沸流國) [註 011] 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 왕 송양 (松讓) [註 012] 이 나와서 보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바다의 깊숙한 곳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아무 데에 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송양 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 왕노릇을 하였다. 땅이 작아 두 주인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세운 지 날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딸려 붙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을 하고 또한 서로 활을 쏘아 재주를 겨루었는데, 송양 이 대항할 수 없었다. [譯註 037]
고구려의 始祖이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東明聖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東扶餘로부터 도망하여 卒本지역으로 와서 高句麗를 세웠다고 한다. 高句麗의 始祖에 관하여 전하는 건국전설 자료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① 廣開土王陵碑 국사편찬위원회 (414년 건립), 牟豆婁墓誌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금석문. ② ≪魏書≫, ≪梁書≫ 국사편찬위원회 , ≪周書≫ 국사편찬위원회 , ≪隋書≫ 국사편찬위원회 , ≪北史≫ 국사편찬위원회 , ≪通典≫ 국사편찬위원회 의 高句麗傳 등 중국측 자료. ③ ≪삼국사기≫ 국사편찬위원회 , ≪삼국유사≫, ≪東明王篇≫ 한국고전번역원 등 국내의 문헌 자료. 이 중 ①은 고구려의 시조가 鄒牟라고 전한다. ②의 자료들은 고구려 시조를 朱蒙이라고 쓰고 있다. ③의 경우,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은 고구려 시조의 王號는 東明이고 본래의 이름은 朱蒙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의 경우 권1 紀異篇 高句麗條 국사편찬위원회 에 本書를 인용한 곳에서는 ≪삼국사기≫의 내용과 같게 쓰고, 王曆篇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도 "第一東明王…名朱蒙 一作鄒蒙"이라 하여 마찬가지이나, ≪三國遺事≫ 권1 北扶餘條 국사편찬위원회 에서 古記를 인용하면서는 다만 ‘東明帝’라 쓰고 있다. 동명왕의 출신국에 관하여도 위의 각 계열의 자료들은 다른 내용을 전한다. ①에서는 鄒牟가 北夫餘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②에서는 朱蒙이 夫餘에서 도망왔다고 하였다. ③의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은 주몽이 東扶餘에서 도망 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 古記를 인용하면서 北扶餘에서 나온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은 금석문의 예와 같은 것이다. ②의 중국 사서들에서는 고구려의 시조는 朱蒙이라고 하면서, 東明은 夫餘의 시조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이들 중국 사서들이 고구려와 부여의 시조가 각각 朱蒙, 東明이라고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부여의 시조를 東明王이라 한 것은 後漢 王充(서기 27∼90경)의 ≪論衡≫ 吉驗篇 국사편찬위원회 과 晉 陳壽(233∼297)의 ≪三國志≫ 권30 魏書 夫餘傳 인용의 ≪魏略≫ 국사편찬위원회 (3세기 전반 경)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이때 이미 부여 시조에 관한 전승이 중국에 알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朱蒙과 鄒牟는 同音異表記이어서 ①과 ②의 자료는 고구려 시조설에 있어서는 일치하는 셈이다. ③ 유형의 자료는 ≪東明王篇≫을 참조해 볼 때 ≪舊三國史≫가 근거가 되었던 것인데, 건국전설의 구조는 거의 같으면서 시조왕의 이름만이 달리 전해지던 내용을 ‘東明=王號, 朱蒙=본래의 이름’이라는 식으로 구분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는 諱法이 일반화된 이후 그렇게 수식한 결과가 된다. 백제에서도 "謁始祖東明廟"( ≪삼국사기≫권23 百濟本紀 多婁王 2년조 국사편찬위원회 )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東明王을 시조로 여기는 예를 볼 수 있어, 夫餘·高句麗·百濟에 모두 시조 동명왕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건국전설의 유무 현상에 대하여는 (1) 동명왕 전설은 원래 부여에 전해오던 것인데 고구려가 이를 끌어다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이라는 견해( 池內宏, ≪高句麗の建國傳說と史上の事實≫, ≪滿鮮史硏究 上世 1≫, 吉川弘文館, 1951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임이 옳고 그를 부여의 시조라 함은 문헌의 오류라 보는 견해( 김상기, 「국사상에 나타난 건국설화의 검토」,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출판부, 1974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이병도, 「부여고」,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3) 부여, 고구려, 백제는 같은 夫餘族 계통의 종족으로서 이들 部族이 각기 분열, 이동하면서 원래의 신화를 변형, 재생성시켜 갔다고 보는 견해( 김철준, 「백제사회와 그 문화」, ≪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5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노명호, 「백제의 동명신화와 동명사회와 동명묘」, ≪역사학연구≫ 10, 전남대학교, 1981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등이 있다.
고구려 왕실의 성씨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高’인 이유가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왕들 중에는 ‘高’가 아닌 ‘解’를 姓氏로 삼은 예도 보인다. ≪삼국유사≫ 王曆篇 국사편찬위원회 에 의하면 제2대 琉璃王 한국학중앙연구원 , 제3대 大武神王 한국학중앙연구원 , 제4대 閔中王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성을 解씨라 하였다. 결국 왕실의 姓氏가 두가지라는 셈인데, ‘解’는 扶餘의 ‘ 解慕漱 한국학중앙연구원 ’·‘ 解夫婁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解’와 같은 것으로 고구려가 부여로부터 나왔음을 반영하는 稱姓이다. 백제의 경우에도 王姓이 ‘扶餘’氏 또는 ‘解’氏로 전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권2 紀異篇 南扶餘·前百濟條 국사편찬위원회 ). 백제의 이러한 예에 대하여 扶餘族 계통의 沸流 한국학중앙연구원 , 溫祚 두 갈래가 백제 연맹국가를 이룬 후 주도권을 잡은 溫祚系가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扶餘族을 상징하는 ‘扶餘’를 성씨로 삼았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65∼70쪽| ≪삼국사기≫백제본기 국사편찬위원회 ). 백제의 경우 ‘解’氏를 칭하는 왕이 현전 왕실계보 상에 나타나지 않는데 반해, 고구려의 경우는 위에서와 같이 3명의 왕이 ‘解’씨를 칭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백제의 경우와는 달리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 왕실의 성이 ‘高’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太祖王 한국학중앙연구원 부터인 것 같다. 이에 대해 太祖王부터 그 성을 高로 바꾸었다는 견해(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93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13쪽)도 있으나 , 태조왕 이후의 왕실 世系가 그 이전의 世系와 다르다고 보고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한 견해( 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한국교육학술정보원 )가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東扶餘의 왕이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北扶餘條에 인용된 古記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해부루가 解慕漱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아들이고 부여의 王姓이 解氏라고 하였다. 또 단군 한국학중앙연구원 河伯之女 한국학중앙연구원 와 관계하여 夫婁를 낳았다고 하는 전승도 있었다( ≪제왕운기≫ 下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삼국유사≫ 권1 기이편 고구려조 국사편찬위원회 ). 일연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이에 따라 해부루 한국학중앙연구원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형제 사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朱蒙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부여로부터 도망나온 것은 이 金蛙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왕위에 있었을 때의 일로 설화는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서 금와는 금색 개구리 모양이어서 이에서 이름을 취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글자 모양에 구애되어 덧붙인 것이고, ‘금와’는 ‘고마’ 혹은 ‘곰’의 音借라는 설도 있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13쪽).
둥부 여왕 해부루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신하이다. 아란불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곧 ‘아라불’, ‘아라부루’의 음차로서 ‘아라’는 ‘아래’의 뜻을 가져, ‘높다’의 뜻을 가진 ‘해’에 대하여, 그의 ‘신하’라는 의미로 쓰여졌다는 견해가 있다( 김영황, ≪조선민족어 발전력사 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8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가시벌’ 또는 ‘가시부리’의 音借라 한다. ‘가시’는 ‘邊’의 뜻으로 해부루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동해변의 땅’으로 옮겨 갔으므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김영황, ≪조선민족어 발전력사 연구≫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그러나 ‘가섭’이란 불교와 관련있는 용어로 혹 불교가 들어온 이후 붙여진 지명이 아닌지 모르겠다. 신채호는 가섭원은 원래 ‘加瑟羅’이던 것을 불교적으로 변개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신채호, 「전후삼한고」, ≪단재신채호전집≫중, 형설출판사, 1972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삼국사기≫의 내용에 따르면 東扶餘라는 이름은 원래의 扶餘에서 解夫婁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동쪽으로 옮겨 나라를 세운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 외 東扶餘에 대하여는 기록 간에 차이가 나타난다. 1) ≪魏書≫ 등 중국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高句麗가 夫餘에서 나왔다고만 할 뿐, 北夫餘 또는 東夫餘로 구분하는 예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2)≪舊三國史≫나 古記類의 기록은 東夫餘는 夫餘로부터 피난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고 하고 朱蒙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이 동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지금의 吉林인 鹿山에 중심하고 있던 扶餘가 3세기 후반 慕容의 침공을 받음으로써 北沃沮 방면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晉書≫ 권97 夫餘國傳 국사편찬위원회 ), 그후 吉林 지역으로 되돌아 간 후에도 이 지역에 계속 남은 부류를 東扶餘라고 부른 것 같다( 노태돈, 「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이런 견해와는 달리 ≪삼국사기≫권14 고구려 본기 大武神王 5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에 나오는 내용 즉, 扶餘의 왕 帶素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죽게 되자 그 아우가 曷思水가에 세웠다는 曷思國이 곧 東扶餘와 같다는 설도 있다( 노중국, ≪동부여에 관한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국학논집≫ 10, 계명대, 1983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東扶餘란 高句麗 쪽에서 보아 동쪽에 위치한 데서 지칭한 국명일 것이다. 이와 구별하여 길림 방면의 부여는 北扶餘라고 불렀다. 廣開土王陵碑 국사편찬위원회 에 의하면 東夫餘는 "鄒牟王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으므로" 廣開土王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경남도 지방이라는 설( 李丙燾, ≪夫餘考≫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오늘의 백두산 부근이라는 설( 왕건군, 임동석 역, ≪광개토왕비연구≫, 역민사, 1985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두만강 유역이라는 설(노태돈, 「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등이 있다.
淹㴲8水의 표기는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廣開土王陵碑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奄利大水’, ≪論衡≫에는 ‘掩淲水’, ≪魏略≫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施掩水’, ≪梁書≫ 국사편찬위원회 ≪北史≫ 국사편찬위원회 (권94 百濟傳)에는 ‘淹滯水’, ≪삼국유사≫ 국사편찬위원회 ≪隋書≫(권81 百濟傳)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淹水’라고 하였다. ≪後漢書≫ 국사편찬위원회 ≪通典≫(권185 夫餘傳) 국사편찬위원회 은 ‘掩□8水’라 하였다. 글자나 음의 착오에 의하여 문헌간에 차이가 생기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魏略≫의 ‘施掩水’는 ‘掩施水’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여러 문헌의 표기 예를 통해 볼 때 ≪삼국사기≫중종 임신간본의 ‘淹㴲8水’를 그대로 채택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본문의 註에 ‘盖斯水’라고도 한다는 것은 ≪삼국사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데 역시 기록 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魏書≫, ≪隋書≫, ≪北史≫ 등은 다만 "一大水"라고만 쓰고 구체적으로 물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강의 현재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의 松花江이라는 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17쪽), 渾河(小遼河)라는 설( 白鳥庫吉, ≪朝鮮古代地名考≫, ≪白鳥庫吉全集 3≫, 197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遼河라는 설( 이지린·강인숙,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197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등이 있다. 그러나 東明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도피 설화 자체가 扶餘와 高句麗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이 강의 현재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졸본천은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高句麗條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卒本州로 되어 있다. 紇升骨城은 ≪魏書≫ 국사편찬위원회 에서 고구려가 처음 도읍한 곳으로 적혀진 이래 ≪周書≫ 국사편찬위원회 ≪北史≫ 국사편찬위원회 ≪通典≫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이를 따르고 있다. 국내 자료로는 廣開土王陵碑 국사편찬위원회 에서 "沸流谷 忽本西 城山"에 도읍하였다고 하였고, ≪삼국사기≫권37 地理志 高句麗條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北扶餘條 국사편찬위원회 에서 인용한 古記에서는 卒本(州)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紇升骨城과 卒本을 같은 곳으로 이해하였으며, ≪삼국유사≫는 흘승골성은 북부여가 도읍한 곳으로, 졸본주는 고구려가 도읍한 곳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 근래에는 흘승골성은 升紇骨城이 전도된 것이며 졸본은 곧 卒忽(솔골) 또는 승흘골의 異稱이라 하여 음운상의 유사성을 근거로 양자가 같은 곳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17쪽). 卒本川은 오늘날의 渾江일 것이다. 본문에서 渾江을 또한 沸流水라 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강의 위치에 따라 달리 불리운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渾江 유역의 桓仁은 고구려가 처음 도읍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五女山에는 고구려의 산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남북 길이 1,000m, 동서 길이 300m 가량의 비교적 큰 규모이다. 또한 부근에는 積石塚 등 고구려의 古墳群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이곳이 고구려 초기 도읍지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진대위, ≪환인현고고조사발굴간보≫, ≪고고(考古)≫ 196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또는 高句驪라고 쓰기도 하였다( ≪漢書≫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後漢書≫ 국사편찬위원회 , ≪三國志≫ 국사편찬위원회 등). ‘驪’에서 ‘馬’를 붙여 쓴 것은 중국인들이 외국의 종족명, 지명, 인명에 대한 卑稱으로 상투적으로 쓴 데에서 온 것으로 생각한다. 대개 중국의 삼국시대부터 ‘馬’를 뺀 명칭이 사용되었다. 또 약칭으로 각각 ‘句麗’ 또는 ‘句驪’로 쓰기도 하였다. ‘句麗’는 ‘溝’와 마찬가지로 ‘城邑’의 의미이고, ‘高’는 ‘크다’는 뜻으로 결국 ‘고구려’는 ‘大城’ ‘首邑’ ‘上邑’의 뜻으로 이것이 도시명 내지 국가명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 李丙燾, 「高句麗國號考」, ≪韓國古代史硏究≫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353∼369쪽). ≪魏書≫ 국사편찬위원회 이후에는 고구려를 지칭하여 ‘高麗’라고 하였고 그것이 고구려 왕에 대한 책봉 기록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 그간 ‘고구려’·‘고려’가 상통하며 사용된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고구려가 長壽王 한국학중앙연구원 또는 廣開土王 한국학중앙연구원 때 ‘고구려’에서 ‘고려’로 國名을 바꾼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정구복, 「고구려의 ‘고려’국호에 대한 일고」, ≪호서사학≫, 19·20합집, 1992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퉁구스 계통의 종족으로 중국 史書에서 秦·前漢代에는 肅愼, 後漢·魏代에는 挹婁, 北魏代에는 勿吉이라 하였다. 靺鞨은 隋·唐代에 불리웠던 명칭으로 ‘靺鞨’이 중국기록에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北齊書≫부터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동명왕대에 이미 고구려가 말갈과 접촉한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이후에도 ≪삼국사기≫에는 말갈이 간혹 나오는데, 隋·唐과의 전쟁 시기 이전에 보이는 말갈은 ‘僞靺鞨’로서( 丁若鏞, ≪강역고(疆域考)≫ 권2 ≪말갈고(靺鞨考)≫, ≪여유당전서≫ 6집 한국고전번역원 ), 이는 濊(濊貊)를 가리킨다는 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9쪽)이 지배적이다. 특히 본문의 동명왕 시기의 말갈은 挹婁를 말하는 것으로 후대의 칭호가 치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鳥山喜一). 말갈은 그 종족의 일부(白山靺鞨·粟末靺鞨 등)가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肅愼-婁-勿吉-靺鞨이 한 종족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견해도 있다( 池內宏, 「勿吉考」, ≪滿鮮史硏究 上世≫ 제1책, 1979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말갈에 대한 여러 견해에 대하여는 한규철, 「고구려시대의 말갈 연구」, ≪釜山史學≫ 14·15합집, 1988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참조.
沸流國의 왕을 말한다. ≪後漢書≫ 권85 東夷傳 高句麗傳 국사편찬위원회 에서 "本消奴部爲王 稍微弱 後桂婁部代之"라 한 ‘消奴’와 음이 유사한 것으로 보고 이를 왕명이 아닌 부락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양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겨루는 것( ≪삼국사기≫ 동명성왕 2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참조)은 소노부족연맹과 계루부족연맹 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처음 소노부족연맹주가 우세하였으나 뒤에 계루부족연맹주인 주몽이 우세해지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李丙燾, 「高句麗國號考」, ≪韓國古代史硏究≫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그러나 소노부로부터 계루부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때를 太祖王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24쪽).
고구려의 시조이다. 朱蒙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同音의 異表記로써 鄒牟( 廣開土王陵碑 국사편찬위원회 , 牟頭婁墓誌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 百濟本紀 국사편찬위원회 , ≪新撰姓氏錄≫ 右京諸蕃 下 高麗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또는 鄒蒙( ≪삼국유사≫ 왕력편 국사편찬위원회 ), 또는 中牟( ≪삼국사기≫ 권6 文武王 10년조의 安勝 冊文 국사편찬위원회 중), 또는 仲牟( ≪日本書紀≫ 天智紀 7년조 국사편찬위원회 ), 또는 (百濟太祖)都慕( ≪續日本紀≫ 권40 桓武 延曆 9년 秋7월 辛巳條 국사편찬위원회 )로도 썼다. ≪魏書≫ 등 중국측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모두 朱蒙이라고 썼다. 모두 東明의 異表記로 보는 견해가 있다( 김상기, ≪국사상에 나타난 건국설화의 검토≫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본문에 보이듯이 朱蒙은 ‘활 잘 쏘는 사람’의 뜻이라고 한다.
貊族이 세운 고대 만주에 있었던 나라. 또는 濊族이 중심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역사에 출현한 시기에 관하여, ≪逸周書≫ 국사편찬위원회 에 보이는 ‘符婁’는 곧 扶餘로서 이미 周나라 초기부터 나타난다는 설과, ≪爾雅注≫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에 나오는 ‘鳧臾’가 곧 扶餘로 漢 이전에 나타난다는 설과, ≪史記≫ 권129 貨食列傳 국사편찬위원회 에 "(燕)北烏桓·夫餘"라 한 것에서 서기전 4세기 경(또는 같은 기록의 근거에서 서기전 2세기 말)에 출현한 것으로 보는 설 등이 있다. ≪三國志≫ 권30 魏書 夫餘傳에 인용된 ≪魏略≫ 국사편찬위원회 에 의하면 부여의 시조 東明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離(또는 離, 豪離)國으로부터 피난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부여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여의 지배층이 북방으로부터 이주해 온 집단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부여의 중심지에 관해서는 현재의 중국 吉林省 農安, 阿城, 吉林 등의 설이 있었으나, 최근에 考古學的 연구 성과에 힘입어 吉林市 일대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되었다. 특히 길림시 부근의 東團山 지역은 부여의 문화유적지로 주목되었다( 노태돈, 「부여국의 경역과 그 변천」, ≪국사관논총≫ 4, 1989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晉紀 穆帝 永和 2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에서 "初夫餘居于鹿山"이라고 하였는데, 이 鹿山은 지금의 吉林이다( 日野開三郞, 「夫餘國考」, ≪史淵≫.34, 194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참조). ‘부여’라는 말은 ‘평야’라는 의미의 ‘伐’·‘弗’·‘火’·‘夫里’ 등과 관련 있다고 보기도 하나, ‘사슴’을 일컫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부여의 중심지 명칭과 연결하여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三國志≫ 권30 夫餘傳 국사편찬위원회 에 의하면 부여는 8만 戶 규모였고 관료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3세기 말 이래 鮮卑族 慕容氏의 침략으로 國都가 괴멸되고 民戶가 대거 遷徙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초기의 기사들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부여가 고구려에 비해 우세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음이 보이나, 점차 쇠약해져 고구려의 압력을 받았음을보여준다. 이에 따라 부여의 민호들은 고구려의 영향 아래로 편입되었고 결국 부여국은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고구려에서 山川에 기도하여 자식을 얻기를 바라는 예는 ≪삼국사기≫권16 山上王 7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에도 나온다. 산천은 곧 地母神, 穀靈神, 水神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에는 나라 동쪽에 ‘隧穴’이 있어서 생산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隧神’이 머무는 곳으로 여겼다. ≪三國志≫ 권30 魏書 高句麗傳 국사편찬위원회 에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於神坐"라 한 기사 참조. 東明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母는 豊穰을 주는 農業神으로 여겨졌다( 김철준, ≪동명왕편에 보이는 신모의 성격≫, ≪한국고대사회연구≫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농업 생산의 풍요와 多産, 得子는 같은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본문의 내용은 풍요를 기원하는 원시사회 이래의 신앙 형태를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帝王韻紀≫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東明王篇≫ 한국고전번역원 ≪삼국유사≫ 권1 紀異篇 東扶餘條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본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면서 이 지명이 보이고 있으나 그 외에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금색은 태양신을 상징하는 聖色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三品彰英, ≪神話と文化史≫, 平凡社, 東京, 1971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520쪽). 개구리는 두꺼비와 모양이 흡사한 것이므로 이는 두꺼비가 인간에게 복을 가져다 준다는 현전하는 巫歌의 전통과 관련되고, 금색 개구리는 곧 태양을 상징하는 것, 또는 鯤淵이라는 연못과 관련하여서는 물 즉 비와 관계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정경희, 「동명형설화와 고대사회」, ≪한국고대사회문화연구≫, 일지사, 199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개구리의 상징성에 관한 다른 예로는 본권 琉璃王 29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에 적색 개구리와 흑색 개구리가 각각 북부여와 고구려의 국가 운명을 예시하는 상징물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개구리를 일종의 靈媒로 인식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다섯 가지의 곡식을 말한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열거된다. ① 麻·黍·稷·麥·豆(≪周禮≫ 天官 疾醫), ② 黍·稷·麻·麥·菽(≪大戴禮≫ 曾子天圓), ③ 稻·稷·麥·豆·麻(≪楚辭≫大招), ④ 黍·稷·菽·麥·稻(≪周禮≫ 夏官 職方氏), ⑤ 粳米·小豆·麥·大豆·黃黍(≪素問≫ 藏氣法時論), ⑥ 稻穀·大麥·小麥·菉豆·白芥子(≪成就妙法蓮華經主瑜伽觀智儀軌≫), ⑦ 大麥·小麥·稻穀·小豆·胡麻(≪建立曼茶羅護摩儀軌≫)(이상 ≪中文大辭典≫, 中國文化大學出版部, 臺北, 1982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참조). ≪三國志≫東夷傳 국사편찬위원회 ≪後漢書≫의 東夷傳 국사편찬위원회 에 의하면 夫餘, 婁, 東沃沮, 韓은 땅이 비옥하여 五穀이 잘 되었다고 한다. 특히 弁辰의 경우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三國志≫ 권30 위서 변신전 국사편찬위원회 )라 한 것을 보면 오곡에 쌀을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통례였던 것 같다.
동명왕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아버지로서 天帝의 아들이라 하였다.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 의하면 解慕漱 한국학중앙연구원 는 다음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 "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皆騎白鵠 彩雲浮於上 音樂動雲中 止熊心山 經十餘日始下 首戴烏羽之冠 腰帶龍光之劍…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 즉 解慕漱는 神政에 있어 人間事에 관여하는 天帝子인 것이다. ‘天王郞’이란 바로 神政을 담당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檀君神話에서의 桓雄의 성격과 같은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출생과 직접 관련있는 내용은 아니나, 동명왕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아버지인 天帝子 解慕漱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출현으로 이전의 扶餘 세력이 東扶餘로 옮겨 갔다는 전승을 앞에 둠으로써 고구려가 동부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수식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동명왕 설화를 시작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이 부분을 ‘東扶餘’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여 서술하고 있다.
또는 太伯山이라 쓰기도 한다. 太白山은 경우에 따라 지금의 白頭山 , 또는 妙香山, 또는 강원도의 太白山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태백산은 妙香山을 가리켰으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古朝鮮條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사≫ 권58 地理志 殷州條 국사편찬위원회 ), 조선 초에도 이 견해를 이어 받아 본문의 태백산을 妙香山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54 寧邊大都護府 山川 및 古跡條 한국고전번역원 ). 태백산이란 명칭은 古來로 北方에 있는 大鎭山을 칭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김상기, ≪국사상에 나타난 건국설화의 검토≫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4쪽) 그 명칭은 여러 곳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태백산은 백두산 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이야기 전개의 무대가 지금의 渾江, 鴨綠江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 백두산 의 남쪽 운운’한 것은 정확하게 그 방향을 정확하게 지칭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이 근처에서 백두산 만한 크기의 산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의 태백산은 백두산 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는 여자를 발견한 것은 漁夫인 强力扶鄒였다고 하였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漁師强力扶鄒告曰 近有盜梁中魚而將去者 未知何獸也 王乃使漁師以網引之 其網破裂 更造鐵鋼引之 始得一女 坐石而出 其女脣長不能言 令三截其脣乃言". 이것은 新羅의 脫解尼師今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동해안에 도착했을 때 ‘해변의 할멈’이 이를 발견하였다는 것( ≪삼국사기≫권22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즉위조 국사편찬위원회 )과 설화 구성상 공통점을 보인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제사탈해왕조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 할멈은 朴赫居世의 ‘海尺之母’인 阿珍義先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라고 밝히고 있다.
夷 또는 馮夷라고도 한다. 중국의 黃河에 사는 水神으로, 四面으로 雲車를 타고 두 마리의 용을 부린다고 한다(≪莊子≫ 秋水篇| ≪山海經≫ 海內北經 郭璞註). 여기서 河伯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다만 河川의 신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상기, ≪국사상에 나타난 건국설화의 검토≫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7쪽). 그러나 고구려에 河神에 대한 신앙이 일찍부터 있었을 터이고, 이 河神에 대한 명칭을 중국 고대 설화에서 빌어옴으로써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몽의 어머니이다. ‘柳花’라는 이름은 동명왕 관계 신화 중에서도 ≪東明王篇≫ 한국고전번역원 , ≪삼국사기≫ 국사편찬위원회 , ≪삼국유사≫ 국사편찬위원회 계통의 자료에서만 전해오고 있다. ≪魏書≫ 등의 중국측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이나 廣開土王陵碑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이름이 전하지 않고 다만 ‘河伯女’로만 적고 있을 뿐이다.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 의하면, 柳花 한국학중앙연구원 는 뒷날 朱蒙 한국학중앙연구원 金蛙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아들들에게 쫓기어 남쪽으로 도망갈 때 五穀의 種子를 주었고, 다시 비둘기를 시켜 보리씨앗[麥子]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朱蒙臨別 不忍違 其母曰 汝勿以一母爲念 乃裏五穀種以送之 朱蒙自切生別之心 忘其麥子 朱蒙息大樹之下 有雙鳩來集 朱蒙曰 應是神母使送麥子 乃引弓射之 一矢俱擧 開喉得麥子 以水噴鳩 更蘇而飛去 云云" 여기에서 柳花는 고구려에 있어 麥類 耕作과 관련된 農業神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김철준, ≪동명왕편에 보이는 신모의 성격≫, ≪류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 1971 한국교육학술정보원 ≪한국고대사회연구≫, 1975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재수록). 한편 柳花가 東明王 14년에 부여에서 죽자, 부여왕은 ‘神廟’를 세웠다고 하며, 太祖大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太后廟’에 가서 제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권15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69년조 국사편찬위원회 권32 잡지 제사지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는 "長女曰柳花 次女曰萱 季女曰葦花"라 하여 유화 한국학중앙연구원 와 두 동생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高句麗條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熊神山’이라 하였다. 본문에서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라고 한 데 반해,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서는 柳花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이 ‘압록에서 나와 웅심연못 가에서’ 놀았다고 되어 있다. ≪東明王篇≫에 의하면 ‘熊心’은 연못의 이름이다.
현재의 鴨綠江이다. 일명 ‘馬水’라고도 불리웠다.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같아서 압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通典≫ 권186 邊防 2 高句麗傳 국사편찬위원회 ). ≪東明王篇≫의 이 부분의 註 한국고전번역원 에서는 "淸河 今鴨綠江也"라 하여 압록강이 ‘淸河’라고도 칭하여진 것처럼 적고 있으며, ≪고려사≫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고려사≫ 권12 地理志 義州條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이에 대해 丁若鏞은 安鼎福의 설을 좇아 ‘청하=압록강’ 설이 오류라고 주장하였다(≪대동수경≫, ≪여유당전서≫ 6집, 경인문화사, 1981).
≪東明王篇≫ 한국고전번역원 에서는 이 부분의 과정에 관하여 ≪舊三國史≫를 상세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王謂左右曰 得而爲妃 可有後胤 其女見王卽入水 左右曰 大王何不作宮殿 俟女入室 當戶遮之 王以爲然 以馬鞭畵地 銅室俄成壯觀 於室中設三席 置樽酒 其女各坐其席 相勸飮酒 大醉云云 王俟三女大醉 急出遮 女等驚走 長女柳花爲王所止 河伯大怒 遣使告曰 汝是何人 留我女乎 王報云 我是天帝之子 今欲與河伯結婚 河伯又使告曰 汝若天帝之子 於我有求婚者 當使媒云云 今輒留我女 何其失禮 王慙之 將往見河伯 不能入室 欲放其女 女旣與王定情 不肯離去 乃勸王曰 如有龍車 可到河伯之國 王指天而告 俄而五龍車從空而下 王與女乘車 風雲忽起 至其宮 河伯備禮迎之 坐定謂曰 婚姻之道 天下之通規 何爲失禮 辱我門宗云云…河伯曰 王是天帝之子 有何神異 王曰唯在所試 於是 河伯 於庭前水化爲鯉 隨浪而遊 王化爲獺而捕之 河伯又化爲鹿而走 王化爲豺逐之 河伯化爲雉 王化爲鷹擊之 河伯以爲誠是天帝之子 以禮成婚 恐王無將女之心 張樂置酒 勸王大醉 與女入於小革輿中 載以龍車 欲令升天 其車未出水 王卽酒醒 取女黃金釵 刺革輿 從孔獨出升天 河伯大怒其女曰 汝不從我訓 終欲[辱]我門 令左右絞挽女口 其脣吻長三尺 唯與奴婢二人 貶於優渤水中 優渤澤名 今在太伯山南"
어떤 기운에 쪼여 임신을 하게 된다는 내용을 가진 설화를 넓은 의미로 ‘感應說話’라 할 수 있다. 특히 햇빛에 쪼여 임신하게 된다는 식의 설화는 만주, 몽고,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 널지 분포하고 있는 설화유형이다( 三品彰英, ≪神話と文化史≫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論衡≫ 국사편찬위원회 이나 ≪三國志≫ 권30 국사편찬위원회 魏書 夫餘傳 국사편찬위원회 에 인용된 ≪魏略≫에 보이는 夫餘의 시조 東明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에 관한 설화에서는 가장 뚜렷한 감응설화의 예가 나타난다. ≪論衡≫ 권2 吉驗篇의 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北夷·離國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鷄子從天而下 我故有娠 後産子 捐於猪中 猪以口氣噓之不死 後徙置馬欄中 欲使馬籍殺之 馬復以口氣噓之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取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南至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渡 魚鼈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주몽이 처음 알로 태어나 알을 깨고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卵生說話의 요소를 보이는 것이다. 난생설화는 滿洲, 우리나라, 日本, 타이완,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등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三品彰英, ≪神話と文化史≫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우리나라 지역에서 난생설화 요소가 나타나는 것으로는 이외에 신라의 시조 朴赫居世 한국학중앙연구원 설화, 신라의 昔脫解 한국학중앙연구원 설화, 금관가야의 시조 首露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설화 등이 있다.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활을 잘 쏘았다는 이야기는 ≪博物志≫ 권7 異聞篇에 ≪徐偃王志≫를 인용하여 徐偃王이 붉은 활과 화살을 얻었다고 한 설화 내용과 서로 상응하는 내용이다.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어의에 대하여 본문의 내용과 같이 ‘활 잘 쏜다’는 뜻으로서 후대에까지 만주어에 같은 계통의 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15쪽). 그러나 ‘주몽’은 ‘동명’의 異表記로서 이를 祭天이나 태양신에 대한 신앙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견해( 김상기, ≪국사상에 나타난 건국설화의 검토≫ 한국교육학술정보원 三品彰英, ≪神話と文化史≫ 한국교육학술정보원 )도 있다.
金蛙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뒤를 이어 東扶餘의 왕이 되었으며 뒤에 고구려 大武神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삼국사기≫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조 국사편찬위원회 ).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 의하면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은 어머니 柳花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도움으로 날랜 말을 알아내어 이것을 획득하게 된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其母曰 此吾之所以日夜腐心也 吾聞士之涉長途者 須憑駿足 吾能擇馬矣 遂往馬牧 卽以長鞭亂捶 群騂馬皆驚走 一馬跳過二丈之欄 朱蒙知馬駿逸 潛以針馬舌根 其馬舌痛 不食水草 甚瘦悴 王巡行馬牧 見群馬悉肥 大喜 仍以瘦錫朱蒙 朱蒙得之 拔其針加餧云".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을 도와 고구려 개국을 도운 인물. 중종 임신간본에는 ‘鳥伊’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 東明聖王 6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高句麗條 국사편찬위원회 의 표기에 따른다면 ‘烏伊’가 옳을 것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1 甲申年條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에서도 역시 ‘烏伊’라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오이 등 3인과 친구가 되어"갔다고만 하여 나머지 두명의 이름이 생략되고 있다. ≪삼국사기≫권13 百濟本紀 溫祚王 즉위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에는 溫祚 한국학중앙연구원 가 卒本扶餘로부터 도망나올 때 "烏干·馬黎 등 十臣과 함께 南行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烏干은 본문의 烏伊(鳥伊)와 서로 유사하며, 馬黎 역시 본문의 摩離와 音이 서로 통한다. 이들이 서로 같은 인물들이라고 할 경우, 결국 같은 인물들이 東明王과 溫祚王을 각각 따라서 건국에 동참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烏伊 한국학중앙연구원 摩離 한국학중앙연구원 는 琉璃王 33년(서기 14년) 온조가 건국한 후에 고구려에서 왕명을 받고 梁貊을 攻滅하고 高句麗縣을 취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모순이 생긴다. 이러한 모순을 나타내는 것은 건국 과정에서 개국왕을 도운 인물에 관한 전설이 분기화하여 각각 적용·수식된 데에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여와 고구려가 각기 ‘東明’을 시조로 여기는 설화를 전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즉 동명왕 설화와 온조의 이주설화가 서로 같은 근원에서 나왔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국측의 자료에서는 주몽이 같이 데리고 간 사람들은 "烏引·烏違等二人" ( ≪魏書≫ 권100 高句麗傳 국사편찬위원회 ), "焉違等二人"( ≪北史≫ 권94 高句麗傳 국사편찬위원회 )이라고 하였다.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을 동행하여 고구려 건국을 도운 인물. 앞의 주석 30 참조.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을 도와 고구려 건국을 도운 인물. 琉璃明王 22년 당시 大輔의 관직에 있었는데, 이때 왕이 사냥에 열중하고 민생에 소홀함을 지적하여 간하다가 大輔職을 박탈당한 후 南韓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琉璃明王 22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엄시수에 이르러 물을 건너갈 수 없게 되자 이와같이 외쳤다고 하는 것은 고구려 왕실의 出自가 하늘과 물의 神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廣開土王陵碑 국사편찬위원회 에도 첫머리에 시조 鄒牟王이 天帝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河伯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딸임을 내세우고 있음을 본다. 대개 같은 시기의 牟頭婁墓誌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도 鄒牟가 "河伯之孫 日月之子"임이 강조되고 있다. 물을 건너기 위하여 이와같이 외쳤다는 설은 ≪魏書≫ 국사편찬위원회 ≪北史≫ 국사편찬위원회 ≪隋書≫ 국사편찬위원회 등도 그대로 전하고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論衡≫과 ≪魏志≫에 인용된 ≪魏略≫ 국사편찬위원회 의 기록에는 東明이 "활로 물을 치니"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랐다고만 되어 있어 앞에 언급한 기록들과 차이가 있다.
물고기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 그 위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설화가 생겨날 수 있는 소재는 북아시아 지역에서 연어·송어 등이 산란기에 떼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다리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데 있었다는 설이 있다( 三上次男, ≪魚の橋≫話と北アジア人≫,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196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이 주장에 의하면 원래는 ‘물고기’ 만의 이야기였던 것이 중국식으로 수식되어 ‘물고기와 자라’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 北齊의 魏收가 편찬한 것으로 後魏의 역사를 다루었다. 24史 중의 하나이다.
현재 전하는 ≪魏書≫ 권100 高句麗傳 국사편찬위원회 에 "朱蒙遂至普述水"로 되어 있다. 보술수는 현재의 중국 吉林省의 渾江(佟佳江)이다. 모둔곡은 이 강의 한 유역이었을 것이다.
주몽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남하할 때 만난 인물로서 고구려 개국을 도왔다. 한편 琉璃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아들이고 太祖王 한국학중앙연구원 의 아버지인 인물도 再思 한국학중앙연구원 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삼국사기≫권15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즉위년조 국사편찬위원회 및 80년조), 이들은 同名異人이다.
왕의 賜姓에 의하여 姓을 칭하게 되는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예였다( 이순근, 「신라시대 성씨취득과 그 의미」, ≪한국사론≫6, 서울대, 198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33쪽). 신라에서의 賜姓의 예로는 儒理尼師今 때 6部에 각기 姓을 내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조 국사편찬위원회 ). 賜姓은 곧 賜恩의 과정 및 방편으로 행해졌던 것으로 그에 따른 특혜를 수반한다. 본문에서 再思 등에게 賜姓하였다 함은 이들이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 공을 세워 결과적으로 귀족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擬制化한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현재 중국 吉林省의 渾江을 말한다. 渾江 중에서 桓仁 근처의 강을 비류수라 했던 것 같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고로써 씨를 삼았다"라고 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씨(氏)와 성이 구분되어 쓰여지지 않았으므로 통상적인 어법에 따라 위와 같이 해 둔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1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에서는 이 부분에 고구려 왕실이 高氏 성을 취하게 된 연유가 햇빛에 감응되어 태어난 데, 또는 동명왕을 높여 ‘高’라 하였다는 ‘一說’을 다음과 소개하였다. "一說 本姓解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以高爲氏 或云 王初誕 擧國高之 因以爲姓"
현재의 중국 遼寧省 桓仁 지역을 일컫는 말로 여겨진다. 본문의 기록은 동명왕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졸본 지역에 다달은 후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대한 또 다른 전승을 전하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졸본부여’는 ≪삼국사기≫에서는 이곳에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 기록에 따르면 졸본에는 이미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일연을 위시한 후대의 학자들은 졸본부여는 곧 고구려라고 이해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북부여조 국사편찬위원회 ). 실제 이 기록의 문맥만으로 이곳에 이미 졸본부여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역에 先住하고 있었던 집단에 대해서 ‘다른 기록’이 이를 ‘졸본부여’라고 칭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 권2 南扶餘·前百濟·北扶餘條 국사편찬위원회 에서는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다만 "(朱蒙)至卒本扶餘 州之王無子 只有三女"라고 한 것이다.
이 부분과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권23 百濟本紀 始祖 溫祚王 즉위년조 국사편찬위원회 에도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주몽은 졸본 지역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된 후 그의 뒤를 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본문의 건국 사실과 다른 것이다.
퉁구스 계통의 종족으로 중국 史書에서 秦·前漢代에는 肅愼, 後漢·魏代에는 挹婁, 北魏代에는 勿吉이라 하였다. 靺鞨은 隋·唐代에 불리웠던 명칭으로 ‘靺鞨’이 중국기록에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北齊書≫부터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동명왕대에 이미 고구려가 말갈과 접촉한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다. 이후에도 ≪삼국사기≫에는 말갈이 간혹 나오는데, 隋·唐과의 전쟁 시기 이전에 보이는 말갈은 ‘僞靺鞨’로서( 정약용, ≪강역고(疆域考)≫ 권2 ≪말갈고(靺鞨考)≫, ≪여유당전서≫ 6집 한국고전번역원 ), 이는 濊(濊貊)를 가리킨다는 설(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19쪽)이 지배적이다. 특히 본문의 동명왕 시기의 말갈은 挹婁를 말하는 것으로 후대의 칭호가 치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鳥山喜一). 말갈은 그 종족의 일부(白山靺鞨·粟末靺鞨 등)가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肅愼-婁-勿吉-靺鞨이 한 종족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견해도 있다( 池內宏, 「勿吉考」, ≪滿鮮史硏究 上世≫ 제1책, 1979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말갈에 대한 여러 견해에 대하여는 한규철, 「고구려시대의 말갈 연구」, ≪釜山史學≫ 14·15합집, 1988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참조.
朱蒙 한국학중앙연구원 松讓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재능을 겨룬 이야기는 ≪東明王篇≫ 인용의 ≪舊三國史≫ 한국고전번역원 에 보다 자세하게 나온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沸流王松讓出獵 見王容貌非常 引而與坐曰 僻在海隅 未曾得見君子 今日邂逅 何其幸乎 君是何人 從何而至 王曰 寡人天帝之孫 西國之王也 敢問君王繼誰之後 讓曰 予是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地方至小 不可分爲兩王 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王曰 寡人繼天之後 今主非神之胄 强號爲王 若不歸我 天必極之 松讓以王累稱天孫 內自懷疑 欲試其才 乃曰 願與王射矣 以畵鹿寘百步內 射之 其矢不入鹿臍 猶如倒手 王使人以玉指環懸於百步之外 射之 破如瓦解 松讓大驚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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