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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역사와 문화유적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37530&v=44 
자료입력 :- 2011년 3월 18일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영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백두산 역사와 문화유적

 

1285(충렬왕 11)에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고조선시대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백두산이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하느님의 작은아들 환웅(桓雄)께서 여러 차례 인간세계에 내려가고자 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뜻을 아시고 하계를 두루 살피시더니 태백(太伯) 곧 백두산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으로 여기시어, 곧 아드님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께서는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시어 그곳을 신시(神市)라 하시니, 이 분이 곧 환웅천황이시다.”

 

이른바 단군신화라고 불리는 이 기사의 무대가 다름 아닌 백두산이다. 단군신화가 반영하는 시대는 청동기문화의 등장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직까지는 백두산 일대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 보고된 바는 없다.

 

백두산은 사화산이 아니라 200300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휴화산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백두산은 한민족의 직접적인 거주지였다기보다는 불을 뿜어내어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특히, 인지가 발달하지 못한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신비로운 금단의 지역으로 여겼을 것이므로, 민족의 시원을 말해주는 신화의 무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백두산 지역은 민족의 기원설화를 안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거주가 제한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백두산 지역에서의 유물·유적의 발굴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숙신·부여·읍루 등의 북방유목민족 계통의 종족들이 백두산 주변에서 흩어져 살았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부여, 북쪽에는 읍루, 동북쪽에는 숙신, 동쪽에는 동옥저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백두산은 위의 여러 종족이 모두 성역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가 강성해진 이후에 백두산은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으며, 발해의 영토 안에 있었다. 연변 지역에는 발해가 건설한 많은 성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발해의 전기의 도성인 구국(舊國, 돈화현 오동성)5경 중의 동경 용원부(훈춘현 팔련성), 중경 흥덕부 등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발해의 영토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셈이므로, 비록 관련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발해시대에도 여전히 성역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후 백두산은 통일신라나 고려의 영역 외곽에 위치하여 북방 이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요를 건국한 거란이나, 금을 건국한 여진족의 발상지도 역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금은 1172(명종 3)에 이 산을 산신으로 봉하여 영응왕(靈應王)이라고 하였고, 1193년에는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책봉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여진족이 백두산을 경계로 흥경(興京)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일대의 우량하(兀良哈)와 두만강 쪽의 오도리(幹都里) 우디거(兀萩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후금이 건국되자 백두산 일대를 자신들의 시원지로 간주하여 영경(靈境)이라고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대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이른바 금봉책(禁封策)을 실시하였다.

 

1434(세종 16)에 세종은 북방 야인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두만강 일대에 6(경원·경흥·회령·부령·온성·종성)을 설치하였고, 1443(세종 25)에는 압록강변에 4(무창·자성·여연·우예)을 설치함으로써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천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백두산 일대는 너무나 광활한 데다 사람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선을 확연히 분획할 수는 없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헌 중에서 1677(숙종 3, 淸 康熙 16)에 궁정내무대신인 무목납(武木納) 4인을 백두산에 파견하여 실황을 조사, 기록한 장백정존록 長白征存錄이 최초의 백두산 답사기록일 것이다.

 

무목납 등은 5월에 북경을 출발하여, 6월에 서남쪽 만강(漫江긴강(緊江)이 합류하는 곳으로부터 등반하여, 617일에 백두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하산하여, 8월에 북경으로 돌아갔다. 무목납이 강희제에게 올린 글 가운데, 백두산 산정의 경치를 묘사한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풀이 다한 곳으로부터 흰 자작나무가 있는데, 완연히 심은 것 같고, 향나무가 총생하고, 노란 꽃이 유난히 고왔습니다. 수풀을 걸어나와, 멀리 바라보니 구름과 안개가 산을 가리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지세를 보니 매우 완만한데, 편편히 보이는 흰빛은 모두 빙설이었습니다. 산정에 못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둘러싸고, 물 가까이 솟아 있는데, 벽수는 매우 맑고 물결이 탕양히 일고, 못가에는 초목이 있었습니다.”

 

이 기록에서도 백두산에 인간의 유적이 있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712(숙종 38) 5월에 청나라의 제의에 의하여 오라총관(烏喇總官) 목극등(穆克登)과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과 조태상(趙台相)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 비가 백두산에 전하는 금석문으로서는 최초의 유적이 될 것이다.

 

그 지점은 백두산의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 높이 2,150m의 분수령 지점이었으니, 합법적인 비도 아니며, 이른바 정계비라고 명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에서 조상의 강토가 싸우지도 못해보고 줄어들었다.”라고 개탄한 바 있지만, 참으로 박권과 이선부의 무책임은 천추의 지탄을 받아도 마땅한 것이다.

 

이 비면에는 위에 대청(大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종서로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을 깎아 기록한다. 필첨식(筆帖植청조의 서기관통관(通官청조의 통역관) 강희 51515일 조선 군관 이의복·조태상, 차사관 허량·박도상, 통관 김응헌·김경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정계비는 높이 72, 아랫부분 너비 55.5, 윗부분 너비 256각기둥 모양이다. 그러나 청이 정계비를 세운 이후에도 조선의 백성들이 월강(越江)하여 백두산 일대를 포함한 간도(間島)에 이주하여 개간을 하는 등 사실상 이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대동여지도해설문에서 백두산에 대해 산줄기가 요동 들판을 가로지르며 일어나 백두산이 되니, 이 산은 조선 산맥의 한아비라, 산에 삼층이 있는데, 그 높이는 200리가 되고, 넓이는 1,000리에 걸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으니, 이름을 달문이라고 한다. 둘레가 800리로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으로 나뉘어 두만강이 된다. 백두산은 분수령 남북으로 길게 뻗쳐 연지봉·소백산·설한등령·철령 등에 걸쳐 있거니와 한 가닥이 동남으로 내달으며 치솟아 도봉 삼각산을 이루고 그 사이를 한강이 흐르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백두산을 수차 등반하였다고 하지만, 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李丙燾)전하는 말에는 그가 국내 각처를 두루 찾아다니며 곳곳을 조사, 연구하고 백두산에도 여러 차례 올라간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교통관계나 그의 생활정도로 미루어보아 간혹 이상한 곳에는 몰라도 전국을 편답(遍踏)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여러 차례 백두산에 내왕하였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라고 김정호의 백두산 등정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백두산 부근을 상세히 표시한 대동여지도를 보면, 김정호의 백두산 등정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여하튼 지도상에 백두산 일대가 가장 상세하게 알려진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비롯된다. 이 지도에도 국경선의 정확한 표시는 되어 있지 않다.

 

1881(고종 18, 淸 德宗 7)부터 청이 금봉책을 철회하고 간도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 조선 백성의 소환을 요구하고, 이 지역의 귀속문제를 명확히 할 것을 희망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3(고종 20)에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하여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였으며, 정계비의 동쪽은 토문강이라고 한 토문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인 토문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토문강과 두만강 중간에 있는 간도는 당연히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은 토문두만강의 다른 표기라고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1885년에는 이중광(李重光)을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삼고 청나라 대표와 함께 정계비를 재조사하게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감계담판이 이루어졌으나 청은 토문이 두만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간도지방에는 청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으며, 조선 백성들이 이 지역에 ()’라고 불리는 자치기구까지 두면서 거주하고 있었고, 또한 주민의 8할을 차지하였으므로, 정계비의 자구 해석만을 고집할 문제는 아니었다.

 

1887(고종 24)에는 청나라에서 다시 홍단수(紅丹水)를 경계로 국경을 정하려 하였지만, 우리측 감계사 이중하(李重夏)이 머리는 베일지라도 국토는 줄일 수 없다(此頭可斷國土不可縮).”고 목숨으로 항거하여 청나라의 주장을 좌절시킨 일도 있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엄연히 다른 데도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면서 토문강 일대의 국토를 잃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의 세력 때문에 관철되지 못한 데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부설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철도부설권을 취하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줌으로써 간도지방인 연변(延邊) 일대에 현재 우리 동포가 180만 명이나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영토로 환원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침략했던 민족항일기에 있어서 백두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력항쟁의 기지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 되었다.

 

19206, 백두산 기슭의 봉오동(鳳梧洞)에서는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인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끄는 700여 명의 독립군과 일본군 제19사단의 병력이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120여 명을 사살하여 독립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하였다.

 

백두산은 이처럼 항일의 전승지로서 독립운동사에 그 이름이 빛날 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에도 백두산은 역시 민족혼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였다. 당시 붉은군대에 맞서 항쟁했던 젊은이들이 백두산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 개마고원유격대가 전투부대를 조직하여 북한군과 투쟁한 활약은 유명하다.

 

현재는 백두산이 천지 수면을 경계로 한·중 양국에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측 백두산에는 도처에 김일성선전탑을 세우는 등 개인숭배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근래에는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하였다고 날조하여, 성지에서의 출생을 강조함으로써 신격화하고 있는데 이처럼 백두산의 자연경관이 개인의 목적을 위하여 파손되어 가고 있다.

 

중국 측의 백두산 실황을 보면, 1958년 천문봉(天文峰)에 기상대를 설치하였고, 1960년에 백두산 일대 21의 면적을 장백산자연보호구로 설정하였으며, 19803월에는 국제생물권보호구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백두산 지역의 산림과 동물이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또한 현재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여,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천문봉 기상대까지 자동차가 오를 수 있도록 도로도 개설하였고, 온천지대 부근에 온천욕실도 만들어 놓았고, 국내인들을 위한 여관과 귀빈을 위한 백산초대소(白山招待所)’도 아담하게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스케이트장·임업국·자연보호구관리국 등이 있다. 특히 두도백하(頭道白河) 근처에서 나오는 장백약수천(長白藥水泉)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에서 아름다운 자연환경 내에 요양원을 설립하여 우리 동포들에게 피서와 요양지로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약수는 포장하여 중국 내외에 공급되고 있다.

 

백두산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곳이라 유물·유적이 거의 없다. 목극등이 비를 세우면서 백두산에 대하여 남긴 기록에,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용담이라 하고, 그 둘레는 70리나 되지만 깊이는 알 수 없다. 물은 북소리를 내듯이 솟고, 돌이 부딪히는 소리는 우뢰와 같은데, 항상 구름 가운데 자옥하게 싸여 있어, 또한 천지라고도 부른다. 못은 다 돌로 되어 있으나, 물에 뜰 정도로 가벼운 것은 분가루 같고 모양은 허파처럼 되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근래의 천지의 모습과 동일하지만, 역시 유적에 대하여 별달리 언급한 바 없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터전을 잡았던 신시라고 하는 천평(天坪)에 대하여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에서도 그 광활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어떤 유적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899년에 러시아 작가 가린이 쓴 백두산 기행문에서도 천지의 신비로움에 대하여 극찬하였으나, 별다른 유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천지의 달문 부근에 백두산 신령을 받들던 종덕사(宗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29년에 건립되었으며, 팔각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팔괘묘(八卦廟)라고도 칭하였다. 근래 폭우로 인하여 파괴된 뒤, 그 절을 지키던 승려도 종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괴물은 황금색으로 머리는 큰 화분만 하고, 두상에는 뿔이 있고, 긴 목에는 수염이 많은데, 머리를 숙여 흔드는 모습이 마치 물을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사냥꾼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겁이 나서 황급히 산꼭대기로 향하였다. 산 중턱쯤 올랐을 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 사냥꾼들이 뒤를 돌아다보니 물 가운데 있던 괴물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모두 그 괴물이 황룡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기록은 앞에서 인용한 국내외의 조사보고를 볼 때 사실로 믿기 어렵다. 특히 근래 중국측에서 자세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두산 천지 주변은 현무암의 고산준령으로서 초목이 살지 못하고, 수중에는 유기질과 부유생물이 극소하기 때문에 천지 중에 대형 척추동물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도 천지에 괴물이 있음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어 관심사가 된 바 있다. 첫번째는 19268월 중순 길림성 기상기재 공급소에서 일하는 주봉영(周鳳瀛)의 목격담이었고, 두 번째는 1980821일 중국 현대작가 뇌가(雷加)와 다른 사람들의 목격담이었고, 세 번째는 1981720일 북한 과학시찰단의 목격담이었다.

 

이상과 같이 천지에 나타난 괴물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영국 스코틀랜드협곡의 네스호에서 나타났던 공룡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약 6500만 년 내지 17000만년 전 주로 해양 중에 생존하였던 파행동물(爬行動物)의 후예가 일찍이 해수의 침입도 없었고, 화산활동이 근래까지도 되었던 백두산 지역에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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