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다리> 조사의 얼과 애환이 깃든 소통의 회로 Stone Bridge of Medie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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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조사의 얼과 애환이 깃든 소통의 회로

자료출처:- MBC 가이드 / 교양 다큐멘타리 

자료입력
:- 1986년 10월호, 글/김진희 사진/김유남10월17일 저녁 9시 45분부터 방송
자료옮김 :- 임충섭 (쿠웨이트 국립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 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한국의 다리>
조사의 얼과 애환이 깃든 소통의 회로
올해는 한강 개발 사업의 대역사가 이루어지는 해로서 MBC 교양제작국은 강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의 하나로 <한국의 다리>를 기획했다. 강에는 인지의 발달과 더불어 땅 위에 길이 생기기 이전부터 자연이 만들어준 천혜의 물길이 있었다.
그 물길을 따라 인류의 문화와 문물이 교류되었으며, 계곡이나 깊은 강물로 길이 약한 곳에는 다리를 놓아 소통함으로써 문명을 발달시켜온 것이다.
한반도에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않은 하천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지정학적 특수성은 우리나라의 문화 발전과 국토 수호의 여건이 되어왔다. 따라서 한국은 일찍부터 '다리 문화'가 발달했다.
그 다리들은 마을과 마을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까지도 이어주는 교통로로서 이음매 구실을 했다.
정교한 축조 기법으로 만들어진 옹래된 돌다리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나무다리들, 이들 옛 다리들은 전구에 흩어져 아직도 남아 있으면서 선인들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그 다리 위에 뚜렷이 남겨진 흘러간 시대의 흔적을 숨김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
<한국의 다리>는 당대의 사람들이 다리를 통하여 오고간 인간소통관계와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오늘날의 메카닠한 소통 행위를 대비하고, 선인들이 끼친 정신 문화를 되새김으로써 ‘맑게 회생하는 한강물’에 때 맞추어, 다리 문화의 ‘인간화’문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옛 사람들은 ‘길’을 통해 문화와 문물을 교류했으면, ‘다리’는 그 막힌 곳을 트여주고 이어주는 큰 구실을 해낸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40여개의 돌다리가 여러 곳에 흩어져 남아있고 세워졌던 때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용, 사자, 해태 등의 석수와 연잎같은 무늬를 새긴 돌다리들은 사찰이나 궁중의 다리에서 발견되었는데 정교하고 신비한 축조 기법은 교량의 생활 기능과 조형미를 아울러 전해주고 있다.
또한 민간의 다리는 별장식없이 벽돌로 쌓거나 다듬어 놓아 다소 조악한 반면 우직하면서 실팍한 맛을 느끼게 한다.
다리의 양식은 '한일자 모양의 평교', 무지개 다리로 물리는 홍교가 있고, 아직도 외나무 다리나 난간으로 이어진 나무 다리가 남아있는 곳도 있다.
옛 다리의 대부분은 석교로 된 홍교인데, 충청남도 논산의 원목 다리 강경 미나교, 전라북도 남원의 오작교, 송광사의 삼청교,승선교, 보성 벌교의 홍교, 여천 홍국사 경내의 홍교등이 꼽힌다.
그리고 경상남도 창녕의 만년교, 통도사 내의 삼성반월교, 일승교, 경상북도 경주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청운교, 백운교, 서울 경복궁의 영제교, 창덕궁의 금천교, 창경궁의 옥쳔교도 홍교에 속한다.
전라남도 함평의 고막천교, 충청북도 옥천의 청석교, 서울 사근동의 살곳이 다리, 장충동의 수표교는 평교 형태이다. 한편 충청북도 진천의 농다리는 평교도 홍교도 아닌 지네 모양을 띤 독특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 옛 다리들에는 한결같이 조상의 얼과 애환이 깃든 생활상이 전설과 역사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프로의 제작을 위해 여러 자료를 제공한 반영환 문화재 전문위원은 60년마다 다리 회갑 잔치를 해 주며, 다리를 수리할 때는 보수 기념비를 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인 마을도 있다고 일러준다.
 다리에 얽힌 세시풍속의 대표적인 예로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정월 대보름의 답교 놀이와 안동 지방의 놋다리 밟기 등이 있으며,그 밖에 영풍 청다리, 평양 다리굿,진도 망가 등 출산과 장례에 얽힌 유습이 숱하게 남아있다.
이렇듯「한국의 다리.는 옛 사람들의 모 든 생활 문화 즉,경제 정치 가정 사회 등 모든 것에 걸쳐 나눠 생각할 수 없는 삶의 공간이었으며,또한 인간 소통을 위한 살아있는 회로였다.
정월 대보름에 다라를 많이 밟으면 자기의 두 다리가 간강해진다고 믿었던 선인들은 은연중 다리를 통해 걸음을 걸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정과 삶이 서로 통하여 공동체 적으로 활성화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날 제3의 발인 자동차만이 질주하는 현대의 다리들, 기계 문명의 경직 속에서 미래의 문화는 보다 인간을 위한 문화, 인간을 위한 예술 공간으로 뻗어나가야 함을 옛 선인들이 엮어놓은 '다리문화'는 조용히 시사해 주고 있다.
특히 보성 벌교에는 도마교라는 300년 된 작은 돌다리가 있는데,그 언저리에는 도망간 말을 매어두는 도마비가 두어개나 남아 있었다.
주막에 들러 막걸 리로 목을 축인 나그네는 요즈음처럼 자동차키를 챙기지 않은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느긋한 걸음으로 도마비 앞에 와 쉬고 있으면 자신의 말을 찾을 수가 있었다니 그 넉넉함이 부러울 뿐이다.
우리 민족은 다리를 교량적 기능뿐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 문화로 형상화 시킴으로써 다리 문화 속의 한국인의 의식 구조와 태어남과 죽음,사랑과 삶의 세계를 구현시켜 왔던 것이다.
우리 어버이들이 자녀들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은유로서 출생의 비밀을 일러준 것도 이와 액을 같이 한다.
동시에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저승 다리,사랑과 사랑을 잇는 칠월칠석의 오작교, 충절의 선죽교,고구려 동명성왕의 거북 다리 등.... 옛사람들은 다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왔던가?
그것은 지금의 신문이나 방송처럼 그 시대로서는 유일한 소통의 회로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보다 인간화된 공간 예술로 세워질 아름다운 미래의 다리들을 상상하여 단단한 시멘트 다리도 좋지만, 옛 돌다리에서 느낄 수 있는 조형의 멋과 인정을 함께 되살려 볼 수는 없는 것인지... 다같이 생각해 볼 문제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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