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문백면 龜山洞(九谷里)의 이름 변화 - 마을 이름 유래 내고향 충북 진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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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문백면 龜山洞(九谷里)의 이름 변화 - 마을 이름 유래


자료출처
:- 
자료생성 :- 2010-11-0 1 林相憲
자료옮김:- 임충섭 (쿠웨이트 국립치과병원, 독도KOREA, 독도천연보호구역킴이,1문화재1지킴이)


龜山洞(九谷里)의 이름 변화

마을 이름 유래                                                                                                                         林 相憲

 

 

구곡리의 현재 주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로 되어 있다.

구곡리의 원래 이름은 귀산동(龜山洞)이고 굴티(屈峙)는 귀치(龜峙)이다. 현재 구곡리 동네 앞에 진천(상산)임씨(鎭川常山林氏)의 선조(先祖)에 대한 여러 개의 비()가 있는데 조상님들의 훌륭한 삶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많이 노력 한 것이 엿보인다. 1100여 년 전에 진천(상산)임씨의 선조 임장군(林將軍)이 놓은 농다리가 있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곳의 비석(碑石) 중에 자연석(155cm * 90cm * 20cm)龜山洞이라고 색인 비()가 있는데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오랜 역사와 함께 구곡리를 지켜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을의 이름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가지 있으나 내용이 너무 애매하기도고 하고 웃기는 이야기도 있다.

귀산동(龜山洞)의 이름은 어떻게 부쳐진 것일까?

龜山洞의 귀()는 어떤 의미로 마을의 이름과 관련이 있나 생각 해 보고자 한다.

귀산동(龜山洞)()의 뜻을 자전(字典)에서 살펴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의 음(), , 로 읽고,

()’의 뜻은거북귀, 별이름귀, 점칠귀, 본뜰귀, 손어러터질균, 나라이름구, 거북구(근래에 추가)’ 로 되어있다.

거북귀에 대하여는갑충지장 외골내육 천성무웅 이사위웅(甲蟲之長外骨內肉 天性無雄 以蛇爲雄)”라고 있다.

그 뜻은 갑충류{甲蟲類} 중에 으뜸이며 몸의 외부는 단단한 뼈로 쌓여 있고 내부는 근육()으로 채워져 있으며 성품은 굳세고 종족 번성이 왕성하며 뱀 무리를 다스리고 거느릴 수 있는 영웅 이다.” 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으니 귀()의 의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 귀한 존재를 의미 한 것 같다.

참고(=):번성할무. ():굳셀웅,영웅웅.

() : 거느릴이 . (): 다스릴위.

()’()는 고려 6대 성종이 진주(진천)를 상산(常山)이라고 지어준 별호에서 따서 龜山洞이란 지명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위와 같이 ()()’에 대하여 살펴본 결과

귀산동(龜山洞)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훌륭한 조상들을 많이 배출하고 살기 좋은 훌륭한 고장이란 뜻이 담긴 이름이라 생각 된다.

 

귀산동(龜山洞)이 구곡리(九谷里)로 귀치(龜峙)가 굴티(屈峙)로 바뀐 것은 일본의 행패였다

이유는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유명한 해전으로 임진왜란 떼 이순신장군이 제작하여 일본의 함대를 무찌른 배의 모양이 거북 모양이며 이름이 귀선(龜船)이다. 이 배에()’라고 쓴 깃발을 달고 해전에 임했었다. 이순신의 함대에 초토가 된 일본의 병사들은 ()’라고 쓴 깃발만 보아도 전투에서 사기가 죽어 도주하고 패전하였다. 임진애란 때 깃발을 단 전함에 패한 일본인은 자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귀산동( 龜山洞)을 구곡리(九谷里)로 귀치(龜峙)가 굴치(屈峙)로 이름이 바뀐 것은 왜정 강점기 때로 전해진다.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고 조선민족의 정신문화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 ()가 있는 옛 지명을 바꾸게 한 것은 일본의 국가 시책 이였다고 본다.

 

이곳 귀산동(龜山洞)에서 110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곳에서 살아온 씨족과 배출한 인물(고려-조선)들을 살펴보면

진천(상산)임씨 는 진천군 문백면 귀산동(龜山洞을 거점으로 서기 918년 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아오면서 신라 말 고려 시대에 진주 일원의 대 호족으로 그 지배한 영역이 (현재 :진천,안성,죽산일원) 넓었으며

전주최씨는 감무공(監務公:士興)이 서기 1413년에 이곳 귀산동(龜山洞)에 안주하여 현재까지 터전을 잡고 살아왔고 (:新昌), (:順天), (:靈山) 소수 가구가 현재까지 살고 있는데 맹()씨는 120여 년 전, ()씨와 신()100여 년 전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여 각 성씨의 후손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아갔다.
 

최유경과 최사흥의 효자문, 임수전과 임현의 부자충신문, 임대철부인 恩津宋氏(은진송씨)의 열여문이 이곳 귀산동(龜山洞)에 정려 되었으니 더욱 훌륭한 고장이라 하겠다.

진천(상산)임씨가 고려 왕족과의 혈연관계가 관심을 끈다. 그 내용을 보면 비()가 다섯 분이 된다.

첫째 분은 태조왕건(太祖王建)의 아홉째 비() 숙목부인(肅穆夫人) 이며 임명필(林名必)의 따님이다. 둘째로는 고려2대 혜종(惠宗)의 비() 의화왕후(義和王后)로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따님이다. 셋째 왕후는 고려 광종(光宗)의 비() 경화궁부인(慶和宮夫人) 임씨(林氏)는 혜종(惠宗) 따님으로 외조부(外祖父)가 진천(상산)임씨 대광(大匡) 임희(林曦) 이시다. 네 번째는 고려 충선왕(忠宣王)의 비() 순화원비(順和院妃)는 장열공(莊烈公) 임연(林衍)의 외손녀(外孫女)이며 다섯 번째로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비() 명덕태후(明德太后)도 장열공(莊烈公) 임연(林衍)의 외손녀(外孫女)이다. 그리고 충혜왕(忠惠王)과 공민왕(恭愍王)은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아들이다. 이와 같이 고려 왕조와 진천(상산)임씨는 깊은 관련이 있다.

관직에 인물을 보면 서기 918년 고려 개국 시 임명필(林名必)은 순군부령에 제수 되셨고

임희(林曦)는 병부령에 제수 되셨고 서기 943(계묘)년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삼한벽상삼중대광삼사(三韓壁上三重大匡三司) 홍화부원군(興化府院君) 상산백(常山伯)에 봉했으며 호()는 충숙공(忠肅公)이시다.

임연(林衍)은 고려 후반기에 위사공신추밀원부사참지정사교정별감호장렬공(衛社功臣樞密院府事參知政事敎定別鑑諡莊烈公) 이시며,

()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통정대부호조참의위교주안렴사(通政大夫戶曹參議爲交州按廉使:洪武庚申(1380))로 태조이년(太祖二年:1393) 계유 (洪武)26323일 경기도우도삼사좌승(京畿道右道三四左丞) 직에 오르시고,

임수(林秀卿)성종 9 (1478) 1012(경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성종 12 (1481) 7 13(병술) 통훈대부(通訓大夫)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사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事)”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임수전(林秀荃)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 영솔하고 진천서 죽산으로 북상하고 있는 왜병과 죽산성에서 격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1592(선조 25) 1213일 장열히 전사하였고

임현(林賢)은 임수전의 아들로 광해조(光海朝)때에 후금국(後金國)이 명()나라 무순을 공격 할 때 명()에 지원군으로 출전하여 부차령(富車嶺)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부자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한 부자충신문이 있다.

임수형(林秀衡)1555년 과거시험 별시(別試)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합격 하였으며 선조(宣祖)16(1583)계미(癸未)년에 군자감정에 오르고

임기용(林起龍)1674(갑인)224일 무과 별시(別試) 병과(丙科) 에 합격 인조(仁祖) 15(1637) 정축(丁丑) 통훈대부어모장군 ( 通訓大夫 禦侮將軍)에 오르고

최사흥(崔士興)은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1343-1413)의 여섯째 아들로 충남 대흥현 감무(監務)로 봉직하고 최사립(崔斯立) 평도공(平度公)6세손이다. 군수를 지냈으며 .

최면성(崔勉誠)은 최사립(崔斯立)의 증손이며 호는 송시재(誦詩齋).

생원(生員) 진사(進士)과에 함께 합방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4개 군의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최석정(崔錫鼎) 1646(仁祖24)~1715(肅宗 41) 조선 문신으로 1666년 진사가 되고 16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설서(設書) 봉교(奉敎) 교리(校理)를 역임 1685년 부제학(副提學)으로 1687년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수리하는데 참여 후에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내고 1697년 우의정으로 . 1699년 좌의정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 했다. 이듬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전임했다가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1702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직을 받았다.

이외에도 귀산동(龜山洞)에서 훌륭한 후손이 많이 배출하였으니 인물 소개란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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