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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야기 - 진천군 - 고려시대

자료출처
:- 중부신도시 사이버 고향마을 http://cyberhome.cb21.net/story/jincheon_goryeo.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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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고려시대

진천군 고려시대

후삼국과 고려초에 이르러 진천지역은 군사적으로나 교통상의 요지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후삼국 초기에는 죽주 호족인 견훤의 세력권에 있다가 900년대 초에는 궁예의 세력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918년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건국한 직후에 많은 호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특히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진천이다. 이때 진천의 호족세력들은 이때 왕건을 도와 고려 초 중앙귀족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잡게 되었다. 왕건과 혼인을 통해 왕실 외척인 진천임씨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순군부령 임명필(林名弼)은 태종 왕건과 혼인한 숙목부인의 부친이었고, 군부령 임희는 혜종의 왕비인 의화왕후의 부친이었다. 이들은 고려 초 병권을 좌우하는 순군부령과 최고 관직인 大匡의 직책에 까지 올라 그 세를 과시하였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자 왕조의 운영을 위하여 중앙과 지방에 대한 정치제도와 사회구조를 정비하게 된다. 중앙의 정치제도는 당제에 따른 36부와 송제에 의한 중추원과 삼사를 두었으며, 그리고 고려 자체의 필요에 의해 만든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島監) 등 여러 정치기구가 운용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지방제도는 군현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본격적인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건국 후 60여년이 지난 성종 2(983) 12목을 설치하면서 부터이다. 이때 진천은 12목 중 하나인 청주에 속하게 된다. 성종 14(995)에는 지방을 10도로 나누고 580여 주, 군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때 진천에는 중원도 소속으로 자사가 파견되었다가 목종 8(1005) 이를 폐지하였다. 현종대에 다시 5도 양계를 골격으로 하는 대대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시 진천은 양광도 소속의 청주목 관하에 있게 된다. 명종 원년(1171)에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둘로 나누어 양광도와 충청주도라 하였으며, 충숙왕 원년(1314)에 다시 양광도라 하였다가 공민왕 5(1356)에 충청도라 하였다.

 



진천 농다리(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



고려후기 무신집권기에 장군 김인준과 김준이 60여년간 지속되었던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자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출신인 임연(林衍)이 이들을 제거하고 다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임연은 몽고침입시 공을 세워 무관직인 대정(隊正)에 임명되었다가 최씨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를 살해한 김준을 도와 그 공로로 위사공신이 되었다. 이후 임연은 김준을 제거하고 최고 실력자가 된다. 임연은 당시 국왕이었던 원종의 폐위, 복위에 관여하는 등 원종과 갈등관계에 있게 되면서 임연을 제거하기 위해 원종이 몽고군에 원군요청을 하게 되고 임연은 개경에 주둔한 몽고군과 항전을 결의하고 전쟁을 준비하다가 병사하게 된다. 이후 그의 아들 임유무가 정권을 잡았으나 3개월만에 살해 당한다. 임연의 집권 시 진천은 진주에서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 의령군으로 승격되었으나 이후 무신정권이 종말을 고하게 되면서 다시 진주로 강등되었다.

현재 진천지역내 고려시대 유적은 불교유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연곡리사지석비(蓮谷里寺止石碑)(보물 제 404)가 대표적이며 용화사, 교성리사지, 옥성리사지, 대문리사지 등의 사지와 용화사 석조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138), 진천문화원 석조보살입상, 만성사 석조여래입상 등의 불상이 있고 청주박물관 지표조사를 통해 구암리에서 청자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임연의 집권기와 관련된 유적으로 농다리와 동호(東湖)가 있다.




진천군 조선시대

진천군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와서 진천은 태조 4(1395) 양광도가 충청도로 개칭되면서 충청도 관할하에 있었다. 태종 13년 군현을 대폭 개편할 시에 진천은 진주에서 진천으로 바뀌고 청주목 관할하에 현감을 두었다. 연산군 11(1505)에는 경기도로 이속시켰다가 중종 원년(1505)에 다시 충청도로 환원시켰다. 세종 26(1444)에 왕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초정약수터까지 가던 중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냈다하여 이곳 지명을 성평이라 하기도 했다.



진천군의 옛지도(해동지도) 


병자호란때 진천출신 인물들은 문백면 출신 임현, 영유현감 송도남, 남한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경세 등이 있다.

영조 4(1728) 이인좌는 영조즉위에 불만을 품고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진천출신 남연년과 이성문, 김천주 등이 반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862년엔 진천의 농민들이 잘못된 정치적 수탈에 항의하여 농민봉기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진천 동학 거두 허문숙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진천현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등 동학의 세력이 거세게 일어났다


진천군 근대이후

진천군 근대이후

진천은 근대에 이르러 몇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맞이하게 된다. 고종 32(1895)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진천군으로 승격되었고 1918년 군면 폐합에 따라 음성군 사다면의 풍동리와 사산리의 2개리와 맹동면의 하서리, 두서리, 대화리, 상돈리, 하동리, 신촌리의 6개리, 그리고 대조면의 미곡리와 천안군 서면의 소백암리, 경기도 죽산군 남면의 동주원리와 가척리의 2개리를 편입하여 군중면, 만승면, 초평면, 문백면, 이월면, 백곡면의 7개 면 80개 동리로 개편 되었다. 이어 194541일 청원군 북이면의 은암, 진암, 용산, 용기의 4개 리를 초평면에 편입하였고 197371일 진천면이 진천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1개읍 6개면의 행정구역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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