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의 비밀 16 - 영녕릉] 1문화재 1지킴이 (진천 농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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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비밀 16 - 영녕릉]

자료출처
:- 문화재청 http://cha.korea.kr/gonews/branch.do?act=detailView&dataId=155383577&sectionId=ocp&type=news&currPage=1&flComment=1&flReply=0

자료생성 :- 2009년 10월 12일 20시 10분 문화재청
자료옮김 :- 1문화재 1지킴이(진천농교 - 쿠웨이트 정부병원 임충섭)


문화재 향기
[조선왕릉의 비밀 16 - 영녕릉]
2009-10-12 오후 06:12



                  사적 제 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황대리 산 83-1

            
영녕릉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여주IC -> 여주읍 방향(37번 도로) -> 왕대리방향(42번 도로에서 365번 도로) -> 이정표





                                            
< 영릉 | 英陵 >


<눈부신 치적으로 조선 역대 왕 가운데 특별히 ‘대왕’으로 불리는 세종이 소헌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합장릉 형식으로는 세종 영릉이 처음이다>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과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 1446) 심씨의 합장릉이다.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 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22세의 나이로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옛 영릉 터에서 출토된 세종대왕신도비(안평대군 글씨)는 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영릉 비각에는 영조 때인 1745년 세운 비석이 모셔져 있다>

원래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 승하 후 광주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이 능은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병풍석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의 고석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바뀐 것들도 있다.

세조 때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되었으나 서거정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봉분을 지키는 석호가 무섭기보다는 해학적이다>


<세종 영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최고의 명당지로 꼽히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라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드러낸 왕릉이다>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 가운데 하나가 영릉(英陵)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했으며, 좌우측에는 청룡·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른다. 정자각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석을 놓았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양석과 호석을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2쌍씩 8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세 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 앞 한층 낮은 단(중계)에 문석인 1쌍, 가장 아랫단(하계)에 무석인 1쌍을 세우고, 문·무석인 뒤에는 각각 마석을 배치하였다.
 



                              < 영릉 | 寧陵 >


<효종과 효종왕비 인선왕후가 잠든 동원상하릉으로, 위쪽이 왕, 아래쪽이 왕비의 능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로 대군 시절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조선 17대 효종(孝宗, 1619~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74) 장씨의 쌍릉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왕에 즉위했다.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난 영릉 재실.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었고,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효종은 무엇보다 북벌정책을 수립하고 군비개편은 물론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그러나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659년 4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인선왕후는 봉림대군을 따라 8년간 심양에 머물며 현종을 낳고, 1645년 귀국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래쪽 인선왕후 능에서 바라본 효종 능. 왕의 봉분 주위에만 곡장이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는 왕과 왕비가 부부이기 때문에 한방을 쓴다는 개념이다>


<정자각 지붕 뒤로 인선왕후 능과 효종 능이 차례로 보인다. 정자각 지붕과 왕릉 사이에 보이는 건물은 비각이다>

원래 효종의 능은 건원릉 서쪽 산줄기(원릉 자리)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1673년 현종 때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여주의 영릉(英陵) 곁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에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同原)에 택정되어 왕릉 앞에 왕비릉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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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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