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간도, 100년 동안의 고독 간도(間島)되찾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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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오딧세이]간도, 100년 동안의 고독

자료출처 :- Weekly 경향원문   http://news.nate.com/view/20090910n12748?mid=n0411

자료생성 :- 2009-09-10 14:50  윤호우 기자



[간도오딧세이]간도, 100년 동안의 고독

외교통상부가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 회신한 공문.
2009년 9월4일은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된 날이다. 간도는 100년 전 간도협약으로 청나라 땅이 됐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살던 수십만의 대한제국 백성은 남의 나라 땅에 사는 외국인 신세가 됐다. 청나라의 재판을 받아야 했고, 일본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야 재판의 불이익을 피할 수 있었다.

1945년 광복이 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외교권을 박탈한 채 청과 맺은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화됐어야 했다. 그러나 광복 후 혼란기에 누구도 간도협약의 무효화를 주장할 겨를이 없었다. 이 사이 간도 땅의 조선족은 중국의 인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중 수교 후 ‘금기사항’으로 치부
1950년 6·25 한국전쟁은 간도를 더욱 중국의 영토로 고착화했다. 동족간의 전쟁에서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미명 아래 전쟁에 끼어들어 간도는 물론 한반도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때 동원된 중공군에는 조선족 출신이 많았다.

분단된 상황 속에서 간도는 이름처럼 섬이 됐다. 정부의 어떤 책임있는 인사도 간도의 ‘간’이란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일부 간도 연구가들만이 평생의 업으로 간도는 우리땅이라는 연구물을 내놓았고 이들의 주장이 간헐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당시 간도에 대한 연구는 1966년 출범한 백산학회를 통해 근근이 이어져 왔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간도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한·중 관계를 틀어지게 할 수 있는 금기사항으로 치부됐다.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이 한국에 알려지자 간도 문제는 뒤늦게 부각됐다. 시민단체인 간도되찾기운동본부도 이때 비로소 발족됐다. 백산학회 사무실에 마련된 것이다. 사무실이라고 하지만 실은 백산학회 사무실에 더부살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올해 간도협약 100주년을 맞았다. 대학생의 자전거 국토순례 홍보가 있었고, 간도협약 100주년 기념 토론회도 열렸다. 정부 차원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간도되찾기운동본부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간도에 대한 우리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탄원서를 발송했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는 간도협약 100주년을 앞두고 외교통상부에 간도 문제에 대한 건의문을 제출했다. 외교통상부는 8월31일 답신을 보냈다. 답신에서 외교통상부는 “추후 간도문제 처리에 있어 귀 협의회의 간도문제에 대한 제언을 참고토록 하겠습니다”고 적었다. 여기에 덧붙여 외교통상부는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주장만으로 간도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간도문제는 다양한 국제법적 이슈와 관련된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입니다”라고 밝혔다.

정부는 그동안 간도 문제에 대해 애써 무시하거나 지나쳤다. 간도협약이 왜 무효인지, 왜 간도가 우리땅으로 주장할 근거가 있는지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연구는 물론 없었다. 그 사이 다른 일부에서는 ‘중국과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 ‘터무니없는 주장이다’라는 식으로 몰아갔다.

간도에 대한 연구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알아서 해야 상황이다. 이제 2009년 9월4일도 지나갔다. 1982년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의 제목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이다. 간도는 100년 동안 정말 고독했다. 어느 누구도 간도를 기억해 주지 않았다. 100년 동안의 고독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고 치자. 그러나 100년 후 앞으로 밀려올 고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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